가문(家門)이야기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의 청순한 연기로 유명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거나 그 원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노라면 도대체 가문(家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베로나의 몬터규 집안 출신의 로미오와 카풀렛 집안 출신의 줄리엣은 사랑하지만 두 집안의 반목 때문에 끝내는 죽음으로 마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야인시대」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두한(金斗漢)이 「나, 안동김씨야.」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집안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는 동양과 서양이 똑같고, 옛날과 오늘이 똑같은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것은 집안으로 상징되는 피붙이이라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일체감이나 연대감을 1차적으로 주고, 인간의 소속감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이 이상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평소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 -물이 아래로 흐르듯- 가장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사람은 자기가 땀 흘려 일구고 가꾼 것에 강한 애착을 갖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요즈음 금융자산관리법 위반으로 모그룹을 때리고, 사학법 개정에 있어서 여론이 분분하지만 어느 것이 가장 능률적이고, 경쟁력이 있는지는 불문가지이다.
오늘날 극심한 가치 혼란과 사회적 무질서의 처방책으로 그동안 소홀했고 외면되었던 전통적 가치인 가문(家門)으로 눈을 돌렸으면 한다. 개인은 힘에 부치고 국가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갈수록 가문의 역할은 증대될 것이다. 국가가 못하는 것을 가문은 할 수 있는 예로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들 것이다.
관료체계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가문을 등에 업은 개인이 한 것이다. 신속하고 대담한 결정은 가문이라는 토양과 자양분에서 이미 도출되었던 것이다. 차제에 신문사, 방송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병원 등 공공적 성격을 지닌 기관이나 단체는 건립취지나 창사이념, 건학정신 등을 존중하여 창의성과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정책을 펼쳤으면 한다.
옛날 왕조국가에 있어서 사대부의 최고의 꿈이 고관대작이 되어 집안을 빛내는 것이었을 정도로 가문이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성취동기를 자극하는 요소이고, 지금도 집안만이 인간의 계속성과 안식을 담보하며, 우리의 모든 사회활동의 밑바탕에는 가문이라는 것이 깔려있기 때문에 가문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물론「집안」하면 원시적이고, 혈연적이며, 전근대적 관념이 떠오를 수 있으나 이제는 이 후진성이 오히려 긴밀성과 통일성으로 연결되어 가문의 잠재력이 발휘되고 순기능이 촉진될 수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Medicic Family)에 의한 문예부흥(renassance)이야말로 가문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만약 그때 메디치 가문이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암흑시대를 얼마나 더 살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어렸을 적이나 지금도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소리를 몇 번은 들었을 것이다. 지금에는 이 말이 많이 낯설지만 그래도 그 말속에는 선인들의 경험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 일족(一族)의 안락만을 생각하는 문벌이나 세도가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집안을 상상해 본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집안이나 미국의 케네디가문 같은 많은 명문(名門)의 대두, 명가(名家)의 출현을 기다린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집안도 나와야 하고, 덕행으로 칭찬이 자자한 집안도 나와야 한다.
내가 집안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일반대중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들이 나라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무거나 다 포식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분별 있고 사려 깊은 마음, 고상하고 우아한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들에 대한 생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명문다운 명문도 없었거니와 정략결혼, 부의 세습, 금권과 관권의 결탁, 그들 끼리만의 리그 등 시정잡배나 패거리 등이나 할 수 있는 행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명가나 명문은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의 축적과 계승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음을 먹는다고 아무나 명문의 반열에 들 수는 없다. 명문거족(名門巨族)은 오랜 풍상과 인내와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집안이라는 것은 될 성 싶은 나무의 떡잎이며, 여우가 마지막에 머리를 보금자리로 두듯 그런 곳이다. 「뿌리 없는 자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욕인 것처럼 확실히 가문은 우리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라 할 수 있고, 지칠 줄 모르는 동력도 되며. 세상에서 전력을 다한 다음 쉴 곳도 된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며, 가문을 일으키고, 가문을 바로잡으며,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곳에 어찌 훌륭한 사람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자식 키우듯이 하는데 어찌 일류기술이나 명품이 생산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05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