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를 찾아서
미학적 인간(美學的人間)이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미와 예술을 추구하게끔 입력되어 있다는 인간관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만 본능이 아니라 탐미적이고 심미적인 것도 생래적인 것이고 선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미학적 인간관은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산봉우리에서 발아래의 경치를 내려 보는 것처럼「인간의 시계(視界)」를 넓혀다는 점에서 그 지대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만이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고 전해지던가. 우리는 자청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선택할 수도 없다. 개가 사람을 잡아먹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나 영국의 산업혁명시기에 태어날 수 있으며,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나 조선 세종대왕의 치세 때에 태어날 수도 있다. 태어남에는 방관밖에 할 수 없으며, 대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나마 「미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사람은 가엾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던져진」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시대와 불화했다고 이야기 하고. 그 땅은 척박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시대와 국가에 선행하는 인간을 해석하기에는 부족하다. 시대와 나라까지도 부차적인 것이라면 분명 섭리가 있을 것이고 공리(公理)가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니, 기독교의 「고난의 찬양」이 그것일 것이고, 장자의 「아침에만 피어나는 버섯과 여름에만 살아있는 쓰르라미」의 일생주의(一生主義) 또는「하루살이와 760여년을 살았다는 팽조」의 제물론(齊物論)이 또 그것이라고 본다.
사람은 인생 곳곳, 세상 도처에서 무너지고 부숴 지고 무릎 끓는다. 호연지기가 넘쳐 주자의 「무이12곡」이나 이황 이이의 「도산12곡, 고산 9곡가」를 토설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고.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는 날이 많아 「사기. 제망매가, 두이노의 비가」등을 짓노라면 화자의 고통이 경감되곤 한다. 진퇴유곡 설상가상의 환경에서 사람은 결국 미학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늘이 들으라 하고. 사람이 들으라고 하니 호곡(號哭)이요 사설(辭說)이다.
미학적 인간은 사물을 규정하지 않고 조건을 달지도 않으며. 이유를 대지도 않는다. 현재에 최선을 다 하자 반전이 일어나고 변통이 생긴다. 일가(一家)도 일가일 뿐이고 일가견(一家見)도 일가견일 뿐인 것은 태산도 하늘 아래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르투스는 시저보다는 로마를 더 사랑한 죄를 지었고, 이탁오는 공자보다는 학문을 더 사랑한 죄를 지었다. 지류보다는 본류를 본류보다는 원류를 생각하는 것도 미학적 인간관의 특징일 것이다.
인간은 상대적 세계에 사는 존재이므로 애조(哀調)를 띨 수밖에 없다. 부른다면 「애상적 존재(哀傷的 存在)」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세익스피의 비극(오셀로 .햄릿, 맥베드. 리어왕) 안데르센의 비극(성냥팔이 소녀, 인어공주)에 침잠하는 것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통한 자기설움이 더 크기 때문이며,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현상까지도 역사성을 갖는데 하물며 사람에 이르러서는 최고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 국보 제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칼 야스퍼스가 말했든 안했든
괴로웠고 고단했던 어느 사람이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과 사무침을 영혼으로 성품으로 조각한 것이다.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미학적 인간의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학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미학적 행위를 하고 미학을 위해 살았던가? 거기에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혜가가 자기 왼팔을 자르자 흰 세상에 홍화(紅花)가 내린 구도정신도 있고. 친구들을 배신할 수 없어 그들이 주는 독배를 사양하지 않은 검군의 의리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프로그램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습득되어 가열된 미적 관심과 미적 의식을 가졌으니 반드시 호모 에스테티쿠스이다. 그러나 이 인간 유형은 한 편 리얼하며 다른 한 편 표표(飄飄)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택할 수 없다면 길은 하나 실존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리얼리즘은 낭만주의이다.」는 말을 깨닫지 못했는데 가장 사실주의적인 것이 가장 낭만적이라는 데서 호모 사피엔스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고. 아마 호모 에스테티구스는 가장 가슴 설레는 인간일 것이다.
2009년 7월 27일
춘천 오봉산에서 소양호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