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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음양(陰陽) 하는 까닭

무릉사람 2019. 2. 19. 22:57

왜 인생에 기쁨이 크면 괴로움도 커야 하는가? 왜 세상에는 선만 가지고도 부족한 것이 많은데 악이 있어 사람을 괴롭히는가? 왜 절정을 맞으면 몰락을 생각해야 하고. 처음 신선한 것도 나중에는 악취가 풍기는가? 분명 인수대비에게 아들 성종의 등극은 득의였을 것이고. 인목대비에게도 아들 영창의 탄생은 환호였을 것이다. 분명 로마의 성문 앞에 육박한 한니발은 자신의 말년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양귀비에게 있어  화청지(華淸池)와 마외파(馬嵬破)는 언제나 겹쳐지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뿐만 아니라 옛날의 뛰어난 사상가들도 이런 의문을 품었었고. 그보다 몇 십만 년 전이나 몇 백만 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들도 이와 같이 그들 운명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궁금했는데, 일찍이 장자는「천하에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태산이 아주 작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요절한 자식보다 더 장수한 이가 없으며, 팽조彭祖(700살을 삶)가 요절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중국 육조시대의 승조(僧肇)법사는 「현도(체득)은 결국 오묘한 깨달음에 있으며, 오묘한 깨달음은 진리 그 자체와 하나 되는 것에 있다. 진리와 하나가 되면 그 자리에 있음과 없음의 대립은 해소되어 같은 것으로 보이게 하고. 있음과 없음이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되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차별도 없어져 버린다.」고 덧붙였다.

 

그윽한 소리는 또 들린다. 명나라 개국공신 유기(劉基)는 「지나치게 쌓으면 새어나가고. 너무 꽉 닫으면 열리며. 너무 뜨거우면 바람이 생기고. 너무 막히면 통한다. 그래서 한 번 겨울이 되면 한 번은 봄이 되고. 한 번 굽히지 않으면 펼 수가 없으며. 한 번 일어나면 한 번 엎드러지고. 한 번 가지 않으면 돌아올 수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고난 없이 영광 없다.」거나 「쉬이 온 것은 쉬이 간다.」는 류(流)는 어설픈 것이다. 「고난은 나의 조력자」이고 「고통은 성장 촉진제」식(式)은 조금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가 우리를 시야 속에 가두고」「사람이 이미 세계를 한정 지었다.」는 것은 아주 잘 본 것이며. 더 나아가「생과 사과 하나」라는 것을 도출했다면 심안(心眼)으로 본 것 일게다. 그렇다면 희비애락은 2개로 대별되거나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어떤 발현양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꽤 높은 도력(道力)일 것이고. 여기에서 천지만물의 이치는 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짝이 있다는 것. 그 짝은 낮과 밤, 남과 여 등의 가치중립에서부터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가치판단의 영역에까지 이른다고 생각한다면 가히 신공(神功)일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음양(陰陽)이 있고. 우리가 음양(陰陽) 해야 하는 까닭은 사유(思惟)의 근거를 갖기 위함이고. 사유의 진작을 바라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음양하지 못하면 중세 유렵의 천동설 같은 것이자 각주구검(刻舟求劍)하는 초나라 사람일 수도 있다. 무릇 풍운(風雲)의 일어남이 없고, 수렴과 확산의 의미를 모르며,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같이 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인 존재가 될 수도 없거니와 생명력도 다 했다고 볼 것이다.

 

2009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