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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은 학 타고, 떠나고

무릉사람 2019. 4. 26. 22:04

지난겨울에는「낮에 나온 반달」을 작사한 윤석중 선생님의 부음을 듣더니만 엇 그제께는 「백자부」로 알려진 김상옥 시인이 돌아가셨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분들의 죽음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분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업적이려니와 이제는 은은하면서도 굳센 기상의 글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이 땅에 머물고 우리와 같이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홀연히 가버리시니 인생이 뜬구름이나 아침이슬 같음에 더욱 허망함을 느낀다. 이제 앞으로 큰 나무가 뽑힌 후의 어지러움을 누가 다독거려 줄 것이고, 큰 나무가 사라짐에 따른 모진 비바람을 누가 막아줄 것인지를 생각하면 이분들의 명성은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김상옥 시인은 부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5일 동안 식음을 끊으시는 등 애통해 하다가 끝내는 사랑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그의 죽음은 더욱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친구였고 동지였고 연인이었고 후원자이면서 비판자였을 부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문들이 큰 활자로 뽑을 만큼 「감당 못할 고통,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거라고 나는 추론한다. 시인께서는 부부는 군자와 요조숙녀의 결합이요 일심동체란 것을 죽음으로써 보여주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이라는 예언을 성취한 것이요 저 당나라의 백낙천이 하늘에서는 비익조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 되리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노시인의 죽음은 군인이 전장에서 산화하고, 덕이 높은 스님이 앉거나 서서 입적하는 것처럼 시인다운 최후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시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을 달리하거나 편안히 죽음을 맞이했다면 애절함이 지금보다 더 못하고 숙연함도 지금보다 더 못하였으리라. 내가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 여 년 전인 내가 19 살 때 동아일보의 「고미술품에 얽힌 이야기」란 시리즈에 시인이 「가락지 필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것이 인연이었다. 그 글에서 시인의 어머님은 남편의 폐병에 허벅지살을 베어 바치고, 자식이 감옥에 있는 동안 겨울 방에 불을 지피지 않는 등 평생을 가난하지만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쳤다. 그 어미님께서는 생전에 금가락지를 한 번 끼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망을 못 들어 드린 분함과 부끄러움에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가락지 필통을 구입하여 그것을 바라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고, 이것은 값비싼 취미나 재산 늘리기가 아니라 순전히 어머님을 생각하는 오기로 샀고 그 오기로 앞으로 남은 인생도 당당하게 살겠노라고 서슬 시퍼렇게 피력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시인이 밝힌 것처럼 무더운 여름날 한 줄기 소낙비를 맞은 것처럼 시원하였으며, 아직도 이런 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으로 용기백배하였다. 나는 또 이글에서 시인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극진한 효심에 눈물을 흘렸고, 시인의 강직한 성품에 마음에 끌려 시인을 흠모하고 사모하게 되었다. 글도 그 분의 것을 닮으려 했고 정신도 내 것으로 하고자 했다. 아! 이제는 정열과 사랑마저 닮으라 하시고 떠나가심을 알게 된다. 나는 시인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먼발치에서 뵌 적도 없지만 의기가 통한다 할까 정서가 맞는다 할까 시인이 쓴 글들이 마음에 쏘옥 들고 일치됨을 느꼈다. 꼭 직접적인 교제와 가르침에 의해서만 학문의 집안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옛날 소림사에서는 속가제자들이 더 뛰어 났다 하고 부처님과 가섭은 이심전심으로 통했었고 사숙(私淑)이란 말도 있어 간접적으로 흠모하면서 배운다 하지 않는가.


 나는 보리밭에 들어가면 맥주에 취하고, 포도밭에 들어가면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시인의 글에 취하고 정신에 홀렸다. 비록 만나지는 않았어도 든든하였고, 의식하지 않았어도 힘이 되었는데, 이제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니 나는 내 육친을 잃은 듯 가슴이 미어지고 어른을 멀리 떠나보내는 어린아이와 같이 두려울 뿐이다. 앞으로 누가 나를 지도하고, 누구를 지표로 삼고, 누구에게 삶의 의문들을 구해야 하나? 나는 내가 마냥 어린아이인줄 알았는데, 시인을 떠나보냄으로써 내가 어린아이가 아님을 알겠고, 나의 시간은 멈췄는데 시인의 시간만 지나가는 것 같고, 나는 아직 홍안의 소년으로 머무르는 것 같은데 시인은 어느새 신선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에서 노시인은 후학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었고, 파란만장한 말이 부족할 정도로 노시인은 온몸으로 세상을 사셨다. 세상의 정치인이나 기술직은 얼마든지 대체 할 수 있고, 대치할 수 있으나 시인만은 절대 불가능함에 더 우러러 쳐다보게 된다. 앞으로 노시인 같은 사람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폐부를 찌르고 영혼을 울리는 글들도 노시인과 더불어 더 이상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삶이 힘들수록 시대가 몸살을 앓을수록 노시인의 족적은 뚜렷하고 향기는 진동하면서 더욱더 그리워질 것이다. 시인은 윤동주가 상정한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 지조 높은 개」일 수도 있고, 시인은 조지훈이 노래한 「구천에서 호곡하는 봉황새」일수도 있으며, 시인은 이육사가 갈망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일수도 있다. -옛사람은, 황학은 신선을 한 번 태우고 날아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읊었는데, 시인도 황학을 타고 떠났으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