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매스컴은 탄핵으로 선거로 세인의 관심을 불러 모으지만, 이럴수록 차분하게 그늘진 곳 어두운 곳을 살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사람, 병고로 시달리는 사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 등. 이 시대의 명분으로부터 밀려나고, 이 시대의 각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는 필경 돈키호테고, 아웃사이더이고, 칼 야스퍼스의 「거꾸로 박힌 활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옥에 있는 한사람을 생각한다. 유명 인사들은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감옥에 가는 등 신상에 중대변화가 일어날 때, 웃으면서 묵묵부답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문답형식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유명한 말이나 글, 또는 시 등을 인용하여 자신의 심정이나 입장을 밝히곤 한다.
맥아더 장군이 은퇴할 때 미 의회에서 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 때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박지원씨도 지난해 불법 대북 송금과 현대 뇌물 사건으로 검찰에 구속될 때 예외 없이 어느 시구로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한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꽃잎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는 조지훈 시인의 「낙화」첫째 연이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참 순수하게 한글로만 이루어진 멋들어진 시구에 처음 놀랐고 그 절제미와 함축성, 시인의 다정다감함에 두 번 놀랐으며, 이 시구를 정확하게 자기의 처지에 연결시킨 박지원씨의 문학적 감수성과 여유로움에 세 번 놀랐다. 그리고 이 시구가 애국시인 조지훈으로부터 토로된 것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박지원씨는 지금 D.J 의 대리인임을 자부하며, 국민의 정부 때 요직을 맡은 사람으로서 잘못이 있으면 정치적, 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또 김대중 정부의 공과를 당당히 심판받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재판에 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고 악수한번 안 나눠봤지만, 배신이 밥 먹듯 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오늘의 세태에서 박씨의 꼿꼿함에 경의를 표하고, 나 또한 인물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박지원씨는 지금 녹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다른 남은 눈마저 잃을 형편에서도, 대북송금은 평화를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뇌물죄는 얼토당토않은 일로 자신은 결백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실정법을 어겼는지 안 어겼는지는 모르지만, 소신 있는 사람이 실명을 하고 건강을 해치며 의기가 꺾이는 것이 아닌가 해서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다. 그러면서 물적 등 다른 방법으로서는 도울 수가 없으므로 나로서는 마음속으로나마 성원하고 격려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이 없기도 하고, 글 한 줄로서 그 용기를 북돋는 일이 내가 할 전부인 것 같다. 부디 건강하시고, 기회가 있으면 발분하여 밀튼이 실명하여 딸에게 「투사 삼손」을 구술한 것처럼, 고통 속에서도 굴원의 「초사,」좌구명의 「국어」, 한비자의 「고분」을 도모한다면 박씨에게는 정치적 승리 못지않은 인간승리로 기록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전에 나는 박지원씨에 대해서 너무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의레 하는 것처럼 그렇게 탐탁하지 않게 보았고. 정치적 입장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저간의 그의 굳센 기백을 보고서 종래 내 시야가 좁았음을 인정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박씨는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한 사람으로 민족화해와 남북통일을 위해서 진력한 전령사요 매개자일수도 있다고 본다. 선각자들이 핍박을 받았듯 그가 우리보다 앞서갔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몰라봤을 수도 있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살아 있지 못하는 과거의 것인 사법의 잣대로는 더욱 판단할 수가 없을 수도 있다.
그의 민족 화해자로서의 역할은 뒷날 반드시 올바른 평가가 내려진다고 보고, 구차하고 파염치한 뇌물 등으로 사람을 망신주지 말라는 태도에서 명예를 생각하는 신사도를 발견했고 그런 것들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거기에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바쁜 일과 속에서도 시를 읽는 그의 정감이 부럽고, 시를 읊고 시로서 표현하는 그에게서 넓은 지식을 보게 된다. ' 그러면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심'을 보고 그가 뼈저리게 느꼈을 환멸을 나또한 느꼈다. 나 같은 사람은 박씨와 같이 고위직을 역임하고 매스컴의 찬사를 받는 사람과 동격이 될 수 없고 그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가 추구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강 알 것 같기에 더욱 박씨를 다시 보게 된다.
지사로서의 시인 조지훈은 자기의 시가 후대에 권력의 흥망성쇠를 말해 주는 것을 알았겠냐만, 분명 이 구절은 어떠한 힘에 의해서 시달리고 부대껴도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적인 정한이 바탕에 흐르면서 남 탓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어느 때는 부덕의 소치로 어느 때는 시기의 문제로 돌리면서 변화를- 그것이 나락이라해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봐서는 떠 밀려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인정함으로써 수용하고 수용함으로써 동화시키는 것이며, 처연한 상황이 되더라도, 끝까지 인종을 요구하더라도 그 자체에서 생명의 힘을 찾겠다는 자기긍정이다.
시인 조지훈, 정치인 박지원, 무명필부인 나는 생사가 다르고 태어남이 다르며 배운 것이 다르지만, 같은 것은 있으니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역경 속에서 배우고 진부한 것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번득이는 말 한마디에 공감하고, 정의란 말에서 냉소를 띨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는 자의 기쁨이고 아는 자의 비애이다. 시대가 열 번을 바뀌어도 부박하고 표변하는 것이 사람들인데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그것들에 개의치 않고 내 방침, 내 철학대로 살겠다는 것은 생명이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식이 짧아 박지원씨의 불행을 통해 조지훈시인의 「낙화」를 알았다는 것에
대해 조지훈 시인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박씨를 통해서 내가 사람보다는 눈이 조금 나아지고,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믿는다, 안믿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생각하는(흔들리는) 갈대임을 간파하고 아이와도 같이 운명이랄 수도 있는 것에 절대 순종하는 자세에서 초극과 체념을 동시에 보게 된다. 간밤에 불암산 자락에 비바람이 잔뜩 몰아쳐 진달래꽃, 산수유 꽃, 개나리꽃, 목련꽃, 벚꽃 등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걱정했는데 아침에 와서 보니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니라 그런지 낙화는 별로 없고 날씨가 맑아지자 더욱 싱그럽고 활짝 피었다. 흐드러지게 핀 저 꽃들은 계절을 마음껏 뽐내고 봄을 노래하지만 수심 많은 사람들은 봄날을 즐기지도 봄꽃을 희롱하지도 못할 것이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사람들 각자를 말한다고 볼때, 사람은 다 그 역할이 있고 시대적 사명이 있음이 다시금 생각난다.
시종일관 자기의 신념을 지키고 초지일관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그 한가지만이라도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존경의 염을 갖게 할 수도 있고, 애잔한 정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다 조금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뿐이라는 것, 우리는 다 같은 배를 탔고, 동병상련해야할 처지이고, 콩을 삶는데 뭐 그리 급하게 콩깍지를 태우느냐는 손사래에「꽃이 지기로서니-」는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두고두고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할 것이다. 한때의 실세가 말하는 권력의 무상함, 조삼모사같은 인심은 세상경영이 구도자의 엄격함과 시인의 순수함이 왜 필요한지 가르쳐준다. 비온뒤 봄날의 아침에 이 시구가 앞동산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이 시구 하나만 의지하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을 굳건히 살수 있을 것 같다. 보석이 그 광채를 감추고, 신념이 우습게 보이는 세상에서 시인 조지훈, 정치인 박지원같이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와 세상이 따듯해 졌으면 한다. 특히 박지원 씨가 한쪽 눈이나마 온전히 볼 수 있고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처럼 대북송금이 정당성을 얻고 금전으로부터 자유로워 결백함이 곧 증명되었으면 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인색하고 칭찬할 줄 몰라 기개 있는 사람들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고 권력싸움인 정치, 교언영색하는 정치 .사람을 편 가르는 정치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소원하고 소외된 것들을 살피고 어루만지는 여유 있는 정치가 되었으면 한다.
-끝으로 조지훈의 「낙화」전문을 실어 본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별이 하나둘 쓰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허 하오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