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여, 아내여,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생각나고 집안이 어려우면 양처가 생각난다.-
내 나이 이제 50줄에 접어들다 보니, 기력은 쇠하고 정신은 혼미하며 몸은 이곳저곳 망가져 있고 재산을 늘리기는커녕 빚만 많이 졌다. 노후의 여유나 늘그막의 한가로움 대신에 종일 수고하나 소득은 없고 바쁘기는 하나 번거로울 뿐이다. 죽음도 생각해 봤으나 실행력이 없고, 해야 될 일이 많아 좌고우면 하다 보면 들어가면 걱정이요 나오면 한숨뿐이라.
내 원래 성격이 독립심이 강하여 남의 도움 받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데다 살아 덕도 못 베풀고 선행도 못하여 사방을 둘러봐도 나 혼자뿐인데, 복 없는 사람이 다행히 처복이 있어 지금은 처의 능력으로 살아가니 이것이 잘한 일인가? 잘못한 일인가?
젊었을 때 남도 땅 벌교에서 만나 나는 봉이요 너는 황이라 하였고, 우리는 한 쪽 날개밖에 없는 비익조(比翼鳥)라 둘이 같이 날아야 온전한 비행이 된다하여 서로 돕고 살자고 하였는데, 25성상(星霜)이 흐른 지금 나는 의기가 크게 상하고 낙담하여 아내에게 점점 부담만 주고 있으니 이 또한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산 이래 아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하였고, 「김아우개가 아내는 하나 잘 얻었다.」고 다들 말하곤 하였다.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신 것이 제일 좋았고, 그 선함과 그 어짊이 나를 항상 넉넉하게 하였다. 나는 아내의 잘남과 그녀의 돋보임에 내가 깎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운도 하였지만 아내의 훌륭함에 그런 것들은 스르르 없어졌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내를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게 하였다. 아내 자랑은 바보나 한다는데, 스승이나 위인에게나 표시하는 존경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치 인간을 통찰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너그럽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조선의 여인」이고,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인 사람이다. 부족함이나 더함도 없이 합당한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런 여성을 내 아내로 둔 것에 대해 매우 행복감을 느낀다. 며칠 전에는 죽어 다시 태어나서 결혼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또 선택하겠는가라는 대화에서 그녀는 다시 태어나 결혼을 또 한다면 나대신 딴 남자와 할 것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대답에 조금은 서운하였지만 나는 그녀가 만약 후생에 있어 저리 한다면 나같이 용렬한 사람보다는 도량도 크고, 덕도 있으며, 능력도 있는 대인을 만나 나를 만나서 못다 한 일을 하고 더 진전 있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가식 없이 바란다.
아내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종래의 여인이기도 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일꾼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가 하기 나름인가. 내가 더 관심을 가지고 내가 더 도와주었더라면 아내는 지금보다 더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세련되었을 것이다. 나는 내 아내가 꾸준히 자기 개발을 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에도 소홀하지 않아 당당한 커리우먼의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아내는 지금까지 나만을 믿고 바라보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곁눈 팔지 않고 소임을 다 하려고 애썼고, 자식들에게는 인자한 어머니로서 애씀을 나는 안다. 근자에는 보고 듣는 것도 많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 이전보다 약간은 덜하지만 가정은 그녀의 절대적인 공간이고 모든 것임을 나는 안다. 거기에 비하면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돈도 제대로 못 벌고 그 흔한 가족끼리의 외식도 못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솜씨도 없다. 딴에 남자라고 감추는 것도 있고, 혼자서 떠안는 것도 있다. 아내가 알면 서운해 하고 화를 낼 일도 하고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가 나를 잘 이해하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하며, 굳이 편을 가른다면 끝까지 나와 같은 한 편이 되리라고 믿는다. 요즘 들어 살기가 어렵고 마음이 위축되다 보니 더욱 아내의 고마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변화무쌍하여 중도에서 의심하고 배반하고 욕하기도 하지만, 아내는 끝가지 나를 옹호하고 지지하며 성원해 줄 것이다. 내가 잘못했으면 나를 불쌍히 볼 사람이요. 잘못과는 별도로 그 잘못을 한 나를 사랑할 사람이다. 그래서 아내는 인생길에서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동지로서 또는 도반으로서 같이 세상을 주유한다고 볼 것이다. 사람들은 부부는 닮는다고들 말한다. 실제 우리 부부가 어딜 가면 남매냐고 하면서 많이 닮았다고들 말한다. 십 수 년을 같이 먹고 바라봤기 때문이요, 같이 울기도 하고, 같이 기뻐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아내에게 준 것은 아주 좋게 나타나는 것 같고, 내가 아내에게서 받은 것은 그리 신통치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녀가 나보다 자질이나 천품이 낫고, 나는 그녀보다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니 어떤 때는 아내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천이 못 따르고 「남자?」인 내가 실력이 부족하고, 「여자?」보다 생각이 옹졸하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글을 쓰면 제일 먼저 읽고서 품평을 하고, 어떤 일에 대한 구상을 얘기하면 철저한 동업의식이 있으며, 사람에 대한 평판에는 그것을 조율한다. 나는 결혼한 이후로 「여자의 말은 아주 옳다.」는 생각을 아내로 인해 확실히 가졌고, 항시 아내와 상의를 하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면 일이 원만하게 잘되고 무리가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내야말로 세상에서 그리움과 존경과 고마움과 애틋함이 극치를 이루는 대상이라고 보고 싶다. 태어남이나 자람이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 부부를 이룬다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창조요 창조주를 닮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어려운 중에 만났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나 이제 비록 재주는 바닥나고 가슴의 뜨거운 정열은 식었지만 아내가 나의 이 생각을 알아준다면 아주 큰 기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