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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

무릉사람 2019. 4. 27. 22:00

아파트 밖으로 어머니가 아이들을 안고 뛰어내리고, 한강에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빠뜨린다. 이곳저곳에서 스스로 해하기도 하고, 딴 생명을 해하기도 한다.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겠지만 오늘날에 더 극성이고 더 빈번하고 더 무자비하다. 매스컴의 요란함 때문인가? 점점 더 갈수록 살기가 어렵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옛날보다 악해졌기 때문인가?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요인들이 중층을 이루고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일 게다.


종교계가 이전보다 막강하고, 시민단체의 활동이 눈부시며, 사회복지제도도 선진국을 뒤따르고, 노동만 하면 의식은 해결 되는 좋은 시대에 삶이 더 고달프고 죽음의 그림자가 사람들을 흟고 지나가는 것은 종교나 도덕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질만능주의가 온 사회를 휩쓸기 때문인 것이다.


미국의 천박한 상업주의를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저속한 자본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탐욕만을 일으키게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사회에서는 막가파나 지존파가 항상 생겨난다고 봐야 하고, 놀랍고 섬뜩하며 망연자실할 일들이 수시로 도처에서 일어나리라고 봐야한다.


우리가 돈을 벌고 ,사회적 발전을 꾀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안락한 생활과 생명의 존귀함과 자아발전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생명을 가볍게 알고 사람을 우습게들 아니 살긴 살되 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우주의 전체 무게와 비견된다는 생명이 침범당하고 훼손되며, 저자거리의 진열품처럼 취급되고 있다. 늘 목숨 걱정에 전전긍긍하고, 아무렇게나 인명을 살상하는 나라에서는 호의호식 한다고 해서 그게 어디 자랑이 될 수가 있고, 물질적 번영을 누린다 해서 그게 어디 맘 편한 생활이 될 수 있겠는가.


죽기를 각오하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구조가 승자만을 위한 구조이고 패자에겐 가혹하게 대하는 구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고, 의사소통이 막히고, 상층사회에로의 진입이 어려운 닫힌 사회이기 때문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다.


승자만 떠받들고, 승자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획득하는 구조에서는 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원망하거나 박복함을 탓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으로 여긴 옛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 페어플레이니 정치도의니 아량이니 여유는 차라리 사치스럽다.


담합과 결탁으로 꽉 짜여 진 사회, 신분이 대물림되는 사회도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남은 것은 악뿐이다. 악밖에 없고. 악밖에 안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상상에 맡긴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귀한 생명들이 정의나 신의 이름으로 도륙을 당하고 살육을 당하고 있다.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조차도 불면 다칠세라 애지중지 금지옥엽하며 생명을 대한다고 보는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떠한 명분과 어떠한 아유를 막론하고 합리화 되거나 정당화 될 수 없다. 생명 앞에서는 이념도, 주의도, 체제도, 사상도 한갓 휴지조각이요 쓰레기라고 감히 나는 천명한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엄격한 성직자나 엄밀한 법률인이 아니라 인류애에 불타는 보통사람들이고, 생명을 존중하는 항간의 여느 사람들이다. 스님이나 산악인들이 산행을 할 때 종소리를 내서 벌레 한 마리라도 발에 밟히지 않게 하려는 그 작은 뜻, 그 갸륵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하늘아래 모든 것은 변화 하지만 생명만은 유일하고 생명만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천 년 만 년 산다면 대단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백년도 채 못살기 때문에 생명은 소중한 것이요 존엄한 것이요 고귀한 것이다.


강가의 돌처럼 흔하거나 재생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애써 지키고, 눈물 흘리며, 모든 죽음에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는데 , 살아 있어야 다시 재기할 수 있고, 기회가 오고, 그리운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타도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사방이 철벽같고 앞이 캄캄하여도 살아있기만 하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올 수 있고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도 생명의 주체이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하고, 이러한 생명존중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대통령이나 노숙자로 확대되어야 하고, 모두 잘 살아야 하고,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축복으로까지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조선시대 왜병도 불성이 있다한 진묵대사의 통찰이 아쉬운 적이 없고, 시바이쩌 박사의 뭇 생명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 적도 없다. 나는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사람들을 제 명에 못살고 죽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메카니즘에 분노하고, 그것들을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짧은 글을 써야하는 나 자신이 한탄스럽다.


나는 종교계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이제 무슨 무슨 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람이 터무니없이 죽는가, 아닌가로 판별하고자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의 기만에 속고 있고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큰 부자는 더 가지려 하고, 더 과시하며, 더 차이를 내려하고, 사치하며 방종 한다. 중산층은 부자를 악착같이 따라가거나 닮으려 하고, 하층민은 중산층을 모방하기도 하나 대부분 자포자기한다.


신용불량자 400만 시대, 5가정에 1가정은 수입이 없다는 우울한 보도는 사람들을 격앙케 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패배감에 젖게 한다. 해체되고 단절된 생명력을 이어주고 인간의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 우리들 산 사람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강포하고 흉포한 사회보다는 비록 초막이지만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는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2004年 1月 2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