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정치고. 이것이 정치인이다
이 땅에서 정치는 영달과 축재의 수단이며. 기계(奇計)의 대상이다. 민초들은 정치(正治)임을 믿으나,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나 국민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는 정치이자 국민인 것이다. 일찍이 진승(진나라에 최초로 봉기)과 만적(최충헌의 사노)이 있어 「왕후장상이 어디 그 씨가 있느냐?」의 기치를 내건 이래 유방(한나라 창건)과 주원장(명나라 건국)같이 그 덕을 본 사람들도 있으나 이 나라에서는 한명회(김종서를 척살함) 유자광(남이를 모함함) 임사홍(조광조를 거꾸러뜨림) 이이첨(영창대군을 죽임) 이완용(을사오적의 괴수) 등의 간신들도 중용되고 행세께나 한 것으로 봐서 정치는 게나 고동도 덤비는 것으로 옛날부터 굳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물론의 최악인 자본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돈은 그야말로 최고의 이데올로기이다. 사람들은 진보나 보수를 부르짖으나 돈 앞에서는 허무맹랑한 소리이고. 천하의 누구라도 돈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좌우투쟁으로 영일이 없는 한국의 혁혁한 전사(戰士)들에게는 정의 균배 자비 등의 보편적 가치들은 사탕발림이자 악세사리인 것이다. 우리네 무명인들은 길거리에서 술에 취에 비틀거릴 수 있거나 선술집에서 작부들과 대작하며 「신라의 달밤」을 부를 수 있고. 우리네 무지렁이들은 비단장수 왕서방이 되고 인력거꾼 김첨지가 되어도 흉이 안 되는 것은 그 기대치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을 운위하고 그 국민을 지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그 국민들과 다름없다면 실망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언어도단 또는 어불성설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 눈에 익숙하고 전혀 낯설지 않게 느끼는 것은 경술국치 이래 이 땅의 정치판에서 반복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빼어난 것은 직립보행의 덕택이고. 사람이 떳떳할 수 있으려면 자주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굴과 아첨으로 살든가 오기로 살든가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 조선시대부터 오늘날의 한국정치까지를 살피면서 적이 우려를 떨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은 케케묵은 봉건적 유물로 치부하는 송학(宋學)이나 조선의 성리학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공리주의라 하여 정통으로 보지 않고 극도로 경계한 것이 정치의 바탕적 추악함에서 오는 예사롭지 않은 시각이라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악하게 행동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유물론적 결정론의 불행한 적중에 대해서다. 그렇다면 정치와 정치인은 백로가 가가이 해서는 안 되는 까마귀이며. 먹을 가까이 하면 묻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허균(홍길동의 저자), 김동명(내 마음은 호수요의 시인)과 고향을 같이 함을 자랑으로 알고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이건희. 정몽구」「노무현. 이명박」의 고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요임금의 천하를 맡아달라는 말에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천이라는 냇가에 귀를 씻은 허유와 그 허유가 귀를 씻은 물조차 더럽다며 소에게 물 먹이기를 거부한 소부를 흠모하였으며,「인간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즐거움은 산림간에서 도의를 논하는 것이 최고다(人間父子樂 林下道義眞).라고 말한 조선의 문장가 김창흡은 오늘의 아버지상으로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제자 마다 세상에 나가 공명을 떨치기를 맹세하나 오직 한 사람의 제자만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시를 읊조리고 돌아오겠다.」고 하여 공자를 기쁘게 한 증점은 죽고 나면 저 세상에서 내가 꼭 만나고 싶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한밤중이라도 깨달음이 있으면 기뻐하며 덩실덩실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었다는 도학자 정명도나 장가든 날 처갓집을 나와 근방의 도교사원에서 도사와 담론하느라 장가간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밤을 새운 뒤 아침에야 처가에 돌아온 양명학자 왕수인으로부터는 삶의 정수가 무엇이지를 배우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의 공자나 그 이름 자제가 때로 익히는 기쁨 (時習)이자 즐거움인(悅卿)인 매월당 김시습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삶이 단순히 수양론이나 도덕론이 아니라 치밀하고 치열한 의식으로부터 촉발되며. 好學과 好文만이 중심을 지켜주고 자신을 보존함을 암시하고 있다. 함석헌옹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이 이 시대의 선악과를 따먹어 눈이 밝아져서 만만치 않고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녹록치 않기를 희망한다. 우리 모두 상아 때문에 죽는 코끼리 신세는 피해야 되는 것 아닌가?
2009년 4월 11일
관악산에 지금은 벚꽃이 열애중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