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혁명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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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는 똑같다. 고려말기 문인 이규보가 「남쪽 집은 부자고 동쪽 집은 가난하여 南家富東家貧 남쪽 집은 가무소리 흐드러지고 동쪽 집은 곡소리 슬프네. 南家歌舞 東家哭」란 시구를 짓고, 시사(詩史)라고 일컫는 두보가 「부잣집에서는 술·고기 썩는 냄새,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널브러져 있네.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라는 시구를 읊은 것은 사회적 비극이 곧 나의 비극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B.C 209년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에 씨가 있느냐?」며 진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래 노예 검투사들에 의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난, 고려말기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의 난, 조선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등 크고 작은 난들이 일어났다. 이 모두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 그 동기였다.
민란(民亂)이나 혁명(革命)이란 용어는 중요하지가 않다.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가 침해받거나 억압받을 때 보에 물이 가득차면 넘치듯 사람들은 원민(冤民)이나 호민(豪民)이 되기도 하고. 내부의 모순이 극심하여 외부로는 발산의 통로가 없을 때도 사람들은 폭발하여 반란군도 되고 혁명군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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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반란이든 혁명이든 정치적인 요인보다는 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주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분배가 왜곡될 때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은 차등분배가 처음에는 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킴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결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공정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사회불안이 야기됨은 잘 모르고 있다. 이럴 때 정치 지도자나 정치권이 이를 잘 조율하면 고비를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큰 파도를 맞게 되는 것이다.
또 주류(지배층, 사회상층부)가 능력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그간 쌓아 놓은 카르텔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하고(의사와 검사들의 떼거지 등), 반대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 기득권인 카르텔(신분 자산 학벌 )에 의해 뜻을 펴지 못할 때( 6두품 최치원) 도 혁명은 어른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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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공정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존·로크의 「공정성의 이론」에 의하면 공정성의 핵심은 운(運)의 중립화로 출생이나 사회적·자연적 여건 등 우연성의 결과를 0으로 할 때 사회는 공정하다고 한다. 즉 로크의 주장처럼 사회나 국가가 공정하게 굴러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딴 마음을 먹거나 두 마음을 가지게 되고 항거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리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될까? 지금 대한민국은 감내할 수 없는 차별의 균형선이 무너졌고, 용인할 수 있는 불공정성의 임계치를 넘어선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절대적 빈곤과 절대적 억압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에 못지않은 오히려 더 조악한 상대적 빈곤과 상대적 억압에 처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기존의 제도들은 효용이 다 하였거나 제 기능을 못하고, 오히려 국력을 소모시키거나 갖가지 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진앙지가 되거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극단적이고 계급적인 국회, 여당과 야당. 한 집안이나 한 정파의 대변지로 전락한 신문과 방송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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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나 시장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에도 그것들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여(주객이 뒤바뀜) 뭐 좀 고치려 하고 앞으로 나가려 하면 반헌법적이니 반시장적이니 하며 발목을 잡는다.
민주주의도 허울뿐인 민주주의인데도 민주주의를 파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4·19혁명, 6·10항쟁, 2017년의 「촛불혁명」도 정치적 민주화뿐이었다. 정치적 민주화란 몇 몇 정치적 야심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민주화일 뿐 진정한 민주화는 아닌 것이다. 진정한 민주화란 경제 민주화가 달성되어야 하고 의식의 민주화가 뒤따라야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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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미국 흑인운동의 역사에서 「법적·정치적 평등만으로는 흑인 해방은 올 수가 없고 오랜 세월 빈곤하게 살아온 흑인들에게는 경제적 정의가 이룩될 때 실질적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통찰력은 높이 사야 하고.
알랭 바티우, 아감벤, 지젝, 안토니오 비그리 등 현대의 대표적인 좌파 이론가들의 「바람직한 정치를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서 찾고. 현대 정치의 대표적인 모델로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상적인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라 보고. 따라서 인민의 권력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바깥에 존재하는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며 거기에 근거하여 기존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는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우리나라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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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 서민들의 잠자리를 이리뒤척 저리뒤척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 아파트 값 폭등이다. 설음중의 가장 큰 설음이 「집 없는 설음」인데, 지금 대한민국 서민들은 깡그리 그 설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10% 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총자산의 50%를 갖고 있고. 문재인정권들어 아파트 값이 70-80% 올랐다는 것은 무어라 변명해도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주거가 불안한 나라. 주거난민이 양산되는 나라. 주거가 불안한데 신체의 자유나 거주·이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주거난 때문에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고 출산을 못하고 있다지 않는가.
신곡(神曲)의 저자 단테가 지옥문에 서자 문에 새겨진 글자가 있었는데 바로 「이 문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이다. 지옥이 따로 없고 희망이 없는 나라나 희망이 없는 사회가 곧 지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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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합법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삥」 뜯고 수탈하고 상납 받고 착취하는 구조이다. 지금 이 땅에는 윤리도 버렸고 도덕도 버렸다. 오늘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을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독일의 여성혁명가 로지 룩셈부르크가 말한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혁명이다. 러시아혁명이 보여준 것 같은 광기, 오욕, 유혈, 음모를 수반하지 않는 혁명, 인문학적 가치가 담겨있는 혁명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로자나 추근이나 이한열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
수구하기 위해서도 개혁해야 하고. 제2의 히틀러나 스탈린을 막기 위해서라도 선제적인 혁명을 해야 하는데도 한국민은 마냥 소 닭 보듯 하며 바벨탑 쌓기에 바쁘다. 지금 한국은 개혁의 시기는 지났다고 본다. 공룡은 멸망만 남을 뿐이다. 그동안 여려 번의 개혁을 노력이 있었지만 번번이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무산됐다. 대표적인 것으로 노태우정권 때 토지공개념 3법이 수구적인 판사들에 의해 좌절된 것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대부분의 개혁은 실패하고 개혁가들은 불운한 삶을 살게 된다.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되면 문학이 영구혁명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이 나라의 문학이나 예술은 어떠한가. 국가는 가치중립이라는 나의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지만 그래도 자꾸만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신채호, 박열 등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등에게 눈길이 가는 건 시대 탓인가, 나이 탓인가.
2021,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