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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이유

무릉사람 2021. 3. 25. 10:35

 

도연명은 중국 동진 때의 사람으로 이름은 잠(), 자가 연명(淵明) 또는 원랑(元亮)이다. 전원시인으로 알려졌고 시작(詩作)을 유흥 정도로 알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본래 이름이 도연명인데 동진이 망하자 도잠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내가 도연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시와 글이 질박하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고. 그의 정신세계에서 나의 지향점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와 내가 비록 시공은 다르지만 정신적인 것이나 삶의 여정이 상당부분 일치하는 데서 오는 동류의식일 것이다.

 

도연명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소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 산천을 좋아하는 품성을 타고 났다.고 했고, 자신을 희황씨(전설 속 상고의 제왕 복희씨)시대의 백성이라고 했는데,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대충 짐작하게 한다.

 

도연명은 깨달음을 얻을 때면 기뻐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고 했고, 지나친 풍족함은 내 바람이 아니라네.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 호학(好學)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는데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산견(散見)할 수 있다.

 

도연명은 남창에 기대어 혼자 거드름 피우고. 내 한 무릎 뻗었으니 여기가 낙토(樂土)라고 하고,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본다.고 하여 너무나도 천연스러운 삶을 보여준다.

 

도연명은 스스로 밝히듯이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전원을 못잊어하다 41세 때 누이가 죽자 이를 구실로 팽덕현 현령직을 사임하고 6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관계에 나가지 않는다. 이때 내가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의 조무래기 감독관한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 我豈能五斗米 折腰鄕吏小兒那라고 한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도연명은 전원에 돌아온 뒤 상견리 고향집이 불타는 바람에 세간도 없이 배위에서 생활을 했으며, 이 무렵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밥 구걸을 하게 된다. 30일에 겨우 아홉 끼(三旬九食)나 모자 하나로 십년(一冠十年)은 이 당시의 지독한 가난을 말해준다.

 

도연명은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歲月不待人)는 말을 하고, 부럽구나, 저 자연의 철에 따른 운행이, 슬프구나, 내 인생의 가고 머무는 걸음이.라는 말을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비애의 시간관념이라고 얘기한다. 도연명을 알아본 소동파는 장강(長江)의 유한함을 부러워하고. 인생의 짧음을 슬퍼한다.고 했는데 도연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리라.

 

도연명은 애주가로 꽤나 알려졌는데, 부인 척씨는 남편이 귀거래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한 단지 담갔다가 주었다 하고. 친구 안연지가 생활비로 2만전을 주고 가자 몽땅 술집에 맡기고는 대놓고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도연명은 생전에 자기의 죽음을 사색하면서 자만시(自輓詩,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을 지어 송나라의 진관이나 임포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또 한정부(閑情賦)라는 사랑시를 지어 인간의 욕정을 긍정하였다.

 

도연명은 국가에서 내려준 시호는 없고 그의 삶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러준 시호가 있으니 정절선생(靖節先生)이다. 또한 도연명은 나와 뗄 수 없는 사이이니 나의 호 무릉어부는 도연명의 글 도화원기(桃花源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도화원기는 기() 319() () 160() 도합479자로 이루어졌는데, 도연명은 도화원을 동아시아인들의 영원한 이상향으로 삼게 하고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도화원기에는 도연명 자신은 물론 남양에 사는 고상한 선비 유자기도 애써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오직 그곳을 가본 사람은 진나라 태원(太元, 376-396)연간의 무릉에 살던 어부 한 사람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21, 3, 25

 

부기, 나는 1964년 봄 어린 나이에 정선 무릉에서 철로 자갈 돌을 깨는 일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