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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수필가로 등단한 사연

무릉사람 2023. 6. 9. 21:21

나는 지난해인 2022()한국수필가협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한국수필’ 3월호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등단 작품은 2편으로 나그네는 서두르지 않는다.’향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이다.

 

어렸을 적부터 책을 안 읽으면 하루가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책읽기를 좋아하고. 젊어서부터 에세이 등을 썼으며, 특히 문인들의 삶이나 문단 뒷얘기등에 흥미를 가졌다. 그렇지만 수필가가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헌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나를 수필가로 인도했다. 몇 번의 엇갈림 속에-

 

20066월 햇살도 부드러운 어느 날, 나는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보령 성주산 전국 시낭송 대회에 오일도 시인의 노변의 애가를 가지고 참가하였다. 결과는 50여명 넘는 인원 중에 용케도 2위 입상이었다.

 

보령에 다녀온 며칠 뒤 몸이 안 좋아 집 근처 봉천동 대로변에 있는 윤주홍의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윤원장님은 첫 대면에 대뜸 목소리가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하시는 거였다. 나중 윤원장님은 봉천동의 슈바이처로 불린 것을 알았다.

 

소년시절부터 웃음소리는 백 만 불짜리라는 말을 들었고, 어디를 가면 성우 아니냐?’면서 싸인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며칠 전 보령에서 시낭송을 했다.’고 여쭈니까 그러냐.’고 하시면서 마침 내 고향이 보령이라면서 매우 반갑게 대해 주셨다.

 

글도 쓰냐?’고 물으시길래 그때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 등을 쓰고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언제 한 번 보여 달라.’고 하셨다. 34일후 다시 방문하여 몇 편을 보여드리니 나는 수필가협회 부이사장도 되는데하시면서 진짜로 글도 잘 쓴다.’면서 추천하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협회 사무총장님과 문자를 주고받아 아무 월호에 등단하며 신인상까지 받는 걸로 돼 있었는데, 그때부터 갈등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가입비나 책값 등은 기본이고 당연한 것인데도 생활은 어려웠고 타이틀을 돈으로 사는 것 같아 슬그머니 포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219, 시인이 된 시골 여지친구의 아들 결혼식이 있어 갔는데, 친구는 답례품으로 두 번째 시집을 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뭔가에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저 친구에게 나은 것은 없지만 빠지지는 않는데, 사회적으로 딱히 내세울 것이 없음을 느꼈다. 어쩌면 수필가란 이름 하나쯤은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아내와 상의한 끝에 다시 수필가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겨우 한국수필가협회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사무총장님과 전화를 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서 하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문운(文運)이 있어 그런지 O·K 싸인이 떨어졌다. 작품도 그때 그 2편으로-

 

16년 동안도 나는 책도 많이 읽었고. 글도 많이 썼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작가로 등단하고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는데 나는 글이 막히고 글이 잘 안 써지는 것이다. 한참 뒤에야 이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부른 뒤부터는 사랑이 아니고, ()도 도라 부르게 되면서부터 도가 아닌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일생에 누구를 만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세간의 말은 내게는 딱히 들어맞는 말이었다. 끝으로 지면을 통해서나마 구순이 훨씬 넘으셨을 윤부이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3,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