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적, 덧없음, 우연성
시 〈악의 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는 근대주의(modernism)를 문학·예술적 경향 또는 태도 관점에서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보들레르는 자기가 몸담고 뿌리내리며 이어받은 전통적인 것들은 굳건하고 지속가능한 것으로 보았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그는 근대를 전통적인 것과 구별한 안목은 있었지만 그도 여느 사람들처럼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보들레르가 신뢰한 전통적인 것들까지도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문예작품은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데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문학·예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하는 모든 것은 보들레르 이전이나 이후를 가리지 않고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시성(限時性)이라는 굴레에서 사는 존재들의 어찌할 수 없는 속성 탓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적 어느 책에서 읽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3가지, 꽃과 아기의 웃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하늘나라에 가지고 갔는데 가는 도중에 꽃은 시들고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사랑만은 변함없었다.‘는 이야기에서 그 어머니의 사랑까지도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은 아닌가.
또 내가 도(道)나 진리의 경지까지 높인 남녀 간의 정(情)도,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며,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희망과 절망은 물론 사람이 기묘하거나 절묘하다고 말하는 것까지도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철학자가 말하는 ’절대정신‘보다는 파괴적이지 않고 유약하다 할 것이다. 또 ’괜히‘나 ’괜한‘ 것과는 다르니 괜히나 괜한은 배제의 미학(美學)이지만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것은 수용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찰나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나간 것에 구태여 미련을 갖고 애착을 느끼며, 추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해가 내일 새로 떠오르는 것처럼 내일은 또 새로운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것들이 다가오고 전개된다는 뜻은 아닐까.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것이 비록 미미하고 가여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비록 모래성이었고 물거품인 것으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를 지녔다고 믿고 싶다. 지금은 찰나적이고, 덧없으며, 우연적인 그 한 가지 사실에도 눈물 나도록 감사해야 할 때라는 것도 알고 있다.
2023,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