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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貪官)과 청관(淸官), 누가 더 나쁜가?

무릉사람 2024. 3. 9. 21:23

세상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마치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글자가 뚝심 있는 사람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 그 몇 배의 하릴없는 사람을 만들 듯이. 그중의 하나가 청관의 해악이 탐관보다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탐관은 부패한 관리를, 청관은 청렴결백한 관리를 지칭한다.

 

원래 이 말은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가 한 말이다. 그는 그 예로서 북송시대의 신법(新法)울 주장한 왕안석을 탐관으로, 주자학을 창시한 주자를 청관으로 지목하면서 왕안석보다 주자가 더 큰 해악을 끼쳤다고 한다. 즉 왕안석의 폐해는 당대에 그치지만 주자의 것은 몇 백 년 동안 두고두고 사람을 옭아매고 괴롭혔다는 것이다.

 

청관이 탐관보다 해롭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실제적이나 역사적으로 많이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청관에 의한 피해가 탐관보다 더 위험하고 오래가며 혹독함도 알 수 있다. 그럼 왜 청관이 탐관보다 악성이고 더 경계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청관은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으로 특정할 수 있고, 탐관은 지탄 받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청관이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이 몇 시대에 걸쳐 경색을 가져오고 문화의 퇴행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가 우상이 되고 그의 사상이 정통이 되어 마치 중국인들에게 옛날에는 유교가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인의 사고력을 빼앗은 것과 비교될 수가 있는 것이다. 탐관은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청관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한 채 자기만 옳다고 여긴다. 세상에는 나쁜 신념도 많은데도 말이다. ‘정절을 잃는 것은 큰 것이고. 굶어죽는 것은 작은 것이라는 등.

 

허균은 사림(士林)의 영수로 꼿꼿한 김종직을 헛 명성을 구하는 자로 매도했다. 이건창은 당쟁의 한 요인으로 관직이 너무 맑은 것官職太淸을 들었는데 이도 맑은 물에 고기가 없다.’와 관련되어 많은 생각을 일으킨다.

 

탁월한 역사가인 사마광은 빈부는 개인의 게으름과 부지런함 문제이므로 나라가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조광조는 인품과 기개는 으뜸이었지만 현실을 도외시한 채 너무 이상적으로 나감에 따라 기묘사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많은 선비를 죽게 했다. 송시열은 개인적으로 우뚝하지만 세계관이 협소하고 폐쇄적이어서 윤휴를 죽이고 나라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정의(正義), 독점이 되지 않는 진리(眞理), 언제나 개폐(改廢)되는 법, 나라마다 다른 도덕관념, 예외 있는 원칙 등의 이름으로 청관은 그동안 얼마나 위세를 부리고 사람에게 무자비했던가. 차라리 몇 천만 원이나 수십억 원의 뇌물을 먹는 탐관이 더 높이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청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누가 말한 대로 탐관은 부패한 걸로 끝나지만 청관은 거기에다 명예까지 훔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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