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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머니스트로소이다.

무릉사람 2024. 8. 24. 20:28

                                                                         스물넷, 가난한 젊은이의 술회(述懷) (9)

 

이따금씩 신문지면을 통해 자살하는 사람의 기사를 읽게 되고, 뒤이어 유력인사들의 자살에 대한 통렬한 논박을 보게 된다. 나는 인간이고 인간에 관계된 모든 것은 나에게도 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아래 이것에 꾸준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살의 동기는 대체적으로 경제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는데, 전자가 일전의 생활고를 비관한 일가족 집단 자살이라면 후자는 인간 초월성을 희구한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경우일 것이다.

 

하여간 그 당부당을 떠나서 죽음을 택한 사람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동시에 애써 그럴 수밖에 없는 근거를 찾으려 하는 것은 세상에는 불가피 한 것도 더러는 있고 죽음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 불가피한 죽음을 추수하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자살에 대한 강력한 반대론이 있었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다는 휴머니즘과 기왕 생명을 받았으니 살아야 하고, 인간은 생명을 빌렸기 때문에 자의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등으로 자살을 죄악시하고 터부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살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 지금까지의 논리들은 이제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아야 한다. 물길이 있어 물이 범람하지 않는다는 지혜를 자살에서도 원용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부분 긍정적인 면도 갖게 된다. 천부적으로 살 권리가 있다면 죽을 권리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방법이 부분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일반화되었고 통념적인 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을 개별적으로 파고 들어서 선별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다. 해서 아래의 3가지 사실들에만 국한하자는 것이다.

 

하나,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한계를 느꼈을 때.

, 생의 지속이 자기동일성을 파괴할 때- 더 이상 산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에 반할 때.

, 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을 때에만 가능케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에 이르게 된 정황과 이론적 제공, 결단은 인간은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만이 책임을 질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의 판단에 맡기자고.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 사전단속을 할 줄 알아야 하고, 극한상황이 아니라면 인생은 살만하지 않은가?

 

197795

남도땅 벌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