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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뭣 때문에 공부할까? 대부분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일 것이다. 옛날사람들의「책속에 쌀이 들어있고. 집이 들어있으며, 미인도 들어있다.」고 여긴 의식은 오늘날에도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공부의 목적이 이것에 국한한다면 너무 공리적인 것이 된다. 공부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내면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납득하지 못한다. 평소 이 뭔가 부족하고. 원가 불충분한 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부의 최종적 목적이나 공부의 끝은 이러한 미진한 것을 없애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전을 많이 읽고 배우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일치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고 뜻이 일치하며 공감하는 것이 일치하고 경영하는 것이 일치하는데 그것은 진리라는 하나의 스승으로부터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조선왕조 5백년」의 작가 신봉승의 입을 쳐다보게 된다. 신봉승은 그의 저서에서「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또「정도전이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 그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올린 문장을 보면 공부하여 무엇에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절로 나온다.」고 하였다.
어쩌면 나의 생각과 그리 똑같은가! 어쩌면 나의 마음과 그리 똑같은가! 그렇다, 우리가 공부하는 최고의 목적을 정도전과 신봉승은 이미 보여준 것이다.
나도 정도전처럼 전각이든 문이든 연못이은 누각이든 산이든 강이든 언덕이든 그것들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고 뜻 있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나도 서거정처럼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나라와 사람을 선양하는 문서를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이 그리스를 침략하자 이에 맞서 싸우자는「아테네 시민이여. 일어나라.」는 명연설문을 작성한 데모스테네스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하여 지리멸렬한 독일 국민을 고취시키기 위해「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란 연설문을 지은 피히테는 또 어떠한가.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국 당나라 때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자 이에 항거하여「이경업을 대신하여 만천하에 알리는 글(代李敬業傳檄天下文)」을 써 오히려 무후의 찬사를 받은 낙빈왕과 황소의 난 때「황소에게 보내는 격문(檄黃巢書)」을 써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신라사람 최치원처럼 그런 글을 쓰는 것이 공부의 진수가 아니던가.
공부는 단지 현실욕구의 충족이나 공명의 도구로만 쓰여 져서는 안 된다. 영혼을 만족시켜주어야 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공부에서 성취를 얻어, 읽는 사람 모두 숙연하며 눈물짓게 만들고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의 자세를 보여주는 제갈공명의「출사표」와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카를 5세 황제에게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한 연설문「내 신앙심을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와 같은 글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동안 부인이 죽자 아내를 그리는 시(輓詩.悼亡詩)를 지었다.「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서로가 내세에는 바꿔 태어나/천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이 마음 이 설음 알게 했으면.(那將月姥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이다. 우리는 추사처럼 자신의 뜻을 하늘에 알리고. 망자(亡者)에게 자신의 마음을 간절히 전하기 위해서도 공부를 하는 것이다.
중국 한나라 초기 육가가 존망의 징조로서「신어 (新語)」열 두 편을 짓고. 한 편씩 발표할 때마다 고조 유방은 좋다고 하지 않은 적이 없고. 좌우에 도열한 신하들은 만세를 불렀다는 고사는 공부를 하는 이유 중의 백미일 것이다.
2013 08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