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무릉사람」인가?카테고리 없음 2019. 2. 24. 12:07
중국 명나라 말기는 어지러웠는데 관리이자 학자인 고헌성(顧憲成)은 강직하였다. 그 때문인가 그는 현실정치에 좌절감을 느낀 뒤「도덕과 이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후학들을 강론하고 저술활동에 치중한다. 그는 스스로를「도화원(桃花源)사람」이라고 자처하며,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고헌성은 왜 스스로를「도화원 사람」이라고 불렀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도화원」을 이해해야 한다.「도화원」은 우리에게「쌀 다섯 말 때문에 소인배에게 절할 수 없다.」라는 말로 너무나 유명한 시인인 도연명이 쓴 글「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별천지요 이상향을 말한다.
그 글의 대강 내용은「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시냇물에 복숭아꽃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상류로 올라갔는데, 물이 다한 데까지 오니 동굴이 있었으며 동굴을 빠져나가니 새 세상이 나타났고 그곳은 곳곳이 복숭아꽃이 만발하였고 바로 선경(仙境)이었다. 사람들은 평화스러웠는데, 몇 백 년 전에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지금이 어느 왕조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고헌성은 자신을「도화원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세상과 구별하였고. 세상에 초연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몽상가로서 살아가길 원했으며. 고대 로마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갖기를 바랐던 것이다. 또 그것은 조선시대 아버지 김수항과 아들 김창집이 비명에 죽을 수밖에 없는「정치」란 것의 비정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헌성의 일생을 돌아보았고. 그의 내면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우리는 비록 존망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지만 그 지향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아마 진리라는 한 스승에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정조 때의 사람 남공철은 북송의 구양수를 흠모하여 자신의 호를 사영(思潁)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고헌성이 자신을「도화원 사람」이라고 부른데서 그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또 나의 마음에 큰 균열을 가져왔다. 대개 아류(亞流)나 부류(部類)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고헌성의 아류나 부류라면 즐겁다고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스스로를「무릉어부」라고 부르니, 이는「도화원 사람」을 사숙했기 때문이다.
2014 0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