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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카테고리 없음 2019. 3. 5. 22:09

    우리가 어렸을 때, 모두가 못 살았던 시절,「잘 살아보세」라는 말이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가난을 벗어나자는 거대한 사회적·국가적 운동이었다. 지금은 국민소득이 1인당 2700만 원쯤 되지만 그때는 그런 개념조차도 아예 없었고, 지금은 수출액이 2013년 기준 1308억 달러이지만 그때는 100억 달러 수출은 높은 산이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지금 그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데 지금 우리가 과연 풍요롭게 사는가? 그동안 우리는 물질만을 바라보며 달려와서 정신이 빈약하고 의식이 허약한 불균형의 삶. 비대칭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닌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이스라엘 광야에서 나온 지 오래되었고, 물질의 근대화의 더불어 정신의 근대화를 이루어야 진정한 근대화이며, 정신과 물질이 병진(竝進)되는 발전이 온전한 발전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람만큼 유물론에 빠져 물질의 노예가 된 국민도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외형적인 것이나 수량적(數量的)인 것에 치우쳐 내면이나 정신이 받쳐주지 못하면 그것은「모래위에 성을 쌓는 격」이 되고「빛 좋은 개살구」라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너무 유심론(唯心論)이나 관념적(觀念的)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유물론(唯物論) 한 쪽으로 쏠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울 강남에 나가보면 아파트 평수가 사람의 가치인양 왜곡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하늘사람은 뭐라 그럴까? 「쟤들은 성냥갑 크기로 우열을 따져, 그리고 목숨을 걸기도 해. 그러니 인간이지.」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이 문(文)·사(史)·철(哲)을 말하면「어쭈, 제법인데 인간인 주제에. 우리의 놀이터에서 놀려고 하다니. 한 번 지켜볼까!」라고 또 말하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유우석의 시「누실명」에 나오는「산이 높다고 명산(名山)이 아니고 낮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고. 못이 깊다고 영험(靈驗)한 것이 아니라 용이 살고 있으면 낮아도 영험하다.」는 말과 대비하면 그 사물을 대하는 인식이나 태도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안락이 바로 행복이고. 하나남에게 간구한 기도의 효과이며. 부처님께 발원(發願)한 것이 이루어 진 것이라면 윤동주가「쉽게 씌어 진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의식구조가 잘못된 것일까? 인생도 쉽게 씌어 진 시처럼 안락한 삶, 그것이 공자(公子)나 공녀(公女)의 생활이라도 그것은 사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일찍이 맹자는「군자는 일생을 걸만한 것을 가지고 걱정하지 소인처럼 하루의 일을 가지고 근심하지 않는다. (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라고 말했는데, 성경에도「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맹자가 평생을 걱정한 것은 아마 역사, 우주. 정의, 사랑. 평화, 공동선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일 것이다.

     

    윌리엄 클라크박사가 일본의 북해도에서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한 말.「소년이여, 대망(大望)을 품어라.」라는 말도 소설 대망(大望)의 주인공 도꾸가와 이에야스처럼 권력을 획득하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도 맹자와 맥을 같이 하여 인류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 뜻이 곧 대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한다. 하늘에는 인간이 자연과 합치하고. 우주를 응시하며, 역사를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있고. 인간의 눈이 떠지고 밝아지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신이 있어 인간의「눈뜸」과 눈「밝음」을 훼방을 놓는다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이렇게 철저히 땅에 주저앉히고 묶어두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맹자가 될 수 없고. 클라크가 될 수 없지만 일 년에 몇 번은 인생을 돌아보고 인생의 의의를 생각하면서 맹자도 되어보고 클라크도 되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일 년에 한 두 번은 맹자가 추구한 것, 클라크가 의미한 것에 자기의 노력과 품성을 할애해도 좋은 것 아닌가.

     

    우리도 이젠 별이 빛나는 밤에는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이나 고흐의 그림「 별빛이 흐르는 밤」을 떠올리며 나의「밤」은 어떨 것인가를 생각하고, 바닷가에서는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나 멜빌의「백경」이나 쥘 베른의「해저 2만 리」를 기억하며, 삶이 혼란스러울 때는 칸트나 니체 또는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들을 만나러 시간여행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삶이 권태로울 때는 루블랑의「괴도루팡」이나 코난 도일의「명탐정 홈즈」또는 에드가 포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어 박진감에 빠지며, 다리를 보면 반드시 서안의 파릉교와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를 떠올려 왜 그 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며 헤어져야 했는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도 이젠 관리(官吏)가 되자 사유재산을 갖지 않은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 주자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송을 하지 않는 간디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소원을 묻자「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가린 저 햇살뿐」이라는 디오게네스나 죽음의 여정에 오르기 전에 가출하는 톨스토이, 심지어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도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의 마음에 금이 가게 하는 것과 그리움의 원천에 대해서 벌써 알았어야 한 것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물질적 성공을 바탕으로 제2의 잘살기 운동인「정신적으로도 잘살기」운동을 펼쳐야 되는 것 아닌가? 이제는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우물물을 길어 올리고. 캐어도 캐도 끝이 없고 한 번만 캐어도 기쁨이 큰 정신의 금맥(金脈)을 캐야 되는 것 아닌가?

     

    -내일 11월 4일 새벽은 윤동주의「별 헤는 밤」이 씌어 진 날입니다.

    쇼팽은 프랑스 파리로 갈 때 고국인 폴란드의 흙을 가져갔다합니다.

     

    2014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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