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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도단」의 시대
    카테고리 없음 2019. 3. 19. 20:51

    나는「동양의 반 고흐」라 일컫는 중국 명나라 때의 문장가이자 화가인 서위(徐渭)가「눈으로는 천금(千金)을 깔보고. 당대(當代)에 홀로 있든 듯하며, 소위 고관과 귀인 또는 문단의 맹주 되는 사람들을 질타하면서 종놈 바라보듯 하였고, 함께 같은 하늘에 사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는 것을 그의 성격 탓으로 알았고.

     

    호방한 정판교나 중국 근대 최고의 화가 제백석(齊白石)이 그의 인장에 서위의 서제 이름 청등서옥(靑藤書屋)를 따서「 청등문하(靑藤門下)의 주구(走狗)」라고 새겨 서위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면서 주구의 개념을 일신(日新)시킨 것도 한 때의 기개정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거기에는「언어도단」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언어도단」이란 기가 막히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며, 아연(啞然)하고 실색(失色)한다는 것입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등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고. 사람이 수단화·물질화 되는 등 가치가 뒤바뀐 상태입니다.「언어도단」의 시대에는 상상력이 억압받고 한정이 됩니다. 그것은 깨우친 사람에게는 곤혹스럽고 참담할 수박에 없습니다.

     

    옛말의「군자는 세상에 도가 있을 때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은둔하는 법」이라는 것도「언어도단」의 시대에는 군자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고.「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뜻을 편다.」는 사기(史記)의 언급에서 지우(知遇)를 시대(時代)로 바꿔놔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덕장상인을 이별하면서 別德藏上人」라는 시에서「급류를 만나면 물러날지니 바위들로 하여금 머리 끄덕인 사람을 저버리지 말라 唯應急流退 不負點頭人」고 했는가 봅니다. 여기서 머리를 끄덕인다는 뜻의 점두(點頭)는 중국 남북조 시대 생공(生公)이라는 사람이 호구산(虎丘山)에서

     

    불법을 강론했는데 믿는 자가 없자 돌들을 모아놓고 강론하자 들돌이 머리를 끄덕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내면기행, 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의 저자 심경호님은「세속을 교화시키고. 세인을 감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서는 차라리 세속의 분잡함, 무의미함과 결연히 단절해야 한다.」고 또 부언합니다.

     

    조신시대 이율곡과 성혼의 문인이었던 윤민헌(尹民獻)은 자찬묘지(自撰墓誌)에서「온 세상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더러웠으므로 같은 대열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했으며, 선비들 사이에서 천리 (天理)가 끊어짐을 분개하고 그 비루함이 마치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했는데「언어도단」의 시대에서는 서위나 윤민헌이나 정신 경계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도단」의 시대에서는 소설가는 소설을 쓰지 않고. 시인은 시를 짓지 않으며,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어디에서 상을 준다고 해도 수상(受賞)을 거부합니다. 나는 이따금씩 고궁에 가면 조지훈의 시「봉황수(鳳凰愁)」를 즐겨 읊는데 그 중의 한 구절「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에서 시인이「언어도단」이 없는 시대를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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