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LL 연설과 게티즈버그 연설카테고리 없음 2019. 3. 24. 18:47
인간이 생물학적 자기보존본능에 의해서 살며, 자연계에서의「적자생존」의 논리가 인간사회를 규율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인간이 어떤 조건에 매이거나 특별성만을 상정한다거나 인과법칙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한계 짓는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부분적 관찰로 인간의 내면에는 잔인할 정도의 미학적 요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가치창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창조는 감동의 근거인데, 감동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곳과 사람이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곳에서 발생한다.
영혼을 일깨우고 존재를 일깨우는 것, 즉「있음」에 만족하지 않고「좋음」에 착안하고 추구할 때 의미가 생성되고, 우리의 마음은 요동치고 균열되는 것이다. 심연에서 의미를 길어 울릴 때에만, 사람은 생각하고 음미할 수 있고 오래도록 잊지 못 한다. 또한 무궁무진한 여운의 정조(情調)에 취할 수 있는 것이다 .
역시나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뜻을 높게 하며 심금을 울리는 것은 단순한 사실의 적시(摘示)나 기술(奇術)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전(反轉)과 절정(絶頂)이 있고 여지(餘地)가 있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젊은이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연설은 우리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무릇 연설은 인간적 고뇌가 서려있고, 미래의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며, 너와 나라는 2분법적 진영논리 대신 A와 B가 합한 c도 있음도 담아야 하고, 등가성(等價性)을 뛰어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설에는 울림이 없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과 비교하면 더욱 그 편협성이나 옹색함이 확연하다.
똑같은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연설이지만 링컨의 연설은 가치를 창출하면서 가치의 공간을 확장한다. 거기에는 향기가 서리고 빛이 비쳐진다. 휴머니즘이 넘쳐흐르고 인간이 추구해야 햘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실이 토대가 되어 인류의 이상을 빚어내고 사람의 시야는 세계와 우주를 응시한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 그것은 철학의 빈곤. 성찰의 부재, 그리고 가치관의 왜곡 때문일 것이다. 자신감의 부족도 있을 것이고, 개방성과 유연성의 결핍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은 결정적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같은 명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좀처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2013 07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