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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살아야 한다.카테고리 없음 2019. 3. 26. 21:03
이 나라가「청춘은 아름다워라.」를 쓴 헤르만 헤세의 모국 독일은 아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사회가 아무리 일제 식민지하「술 권하는 사회」와 다름없고. 이 시대가「사(死)의 찬미」를 낳은 일본 에도시대와 같다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 지금 쉘리가「비탄(悲嘆)」에서 읊은「청춘의 영광」에서 그 청춘이 꺾어지고. 이형기가「낙화(落花)」에서 노래한「나의 청춘」이 무너지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는 말이나「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고, 여분의 힘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너무 멀기만 하다.
과연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는 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말한「내가 살아있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한 내일이다.」라는 말이나「새를 키우는 까닭은 날려 보내기 위함이다.」라는 말은 통약 불가능한 하늘 밖의 언어인가?
우리는 젊은이들에게「위대한 반역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나 「가을바람 가을비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秋風秋雨愁殺人)」라는 절명시를 남긴 추근 같은 여성혁명가.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시인 바이런이나 남미의 체 게바라 같은 열혈남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윤동주가「시가 쉽게 쓰여 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라는 말에서 암시를 얻고,「모든 문학과 예술의 감동의 조건은 내용과 고뇌가 담겨있느냐의 여부」라는 말에서 인생도 문학과 예술 같아 그 내용과 고뇌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을 뿐이다.
중국의 고비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낙타초란 풀이 있는데, 가시가 있어 낙타가 통째로 먹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살아남으며 이 풀을 먹는 낙타의 입안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여 사막에서의 치열한 생존방식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한다고 한다.
또 옛날의 몇 몇 화가들은 종이의 맨 꼭대기에만 산봉우리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놓고 나머지는 공백으로 남겨두었어도 훌륭한 그림이라 했다는데, 그것은 산이 있으면 당연히 그 앞에는 언덕이 있고 내가 흐르며 수풀이 있고 꽃이 만발하며 토끼와 다람쥐가 당연히 뛰노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고.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이야기도 진부하고. 중국의 위대한 문호 노신은 평생을 전사(戰士)로 살기를 원했으며 그의 아이콘 항전의식(抗戰意識)도 고루하다고 쳐도 적어도 헝그리정신이라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소털같이 많은 날은 그 자체가 운수(運數)인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파랑새의 메테르링크처럼「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도 당송팔대가중의 한 사람인 한유처럼「운명과 시대가 모의했지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죽음은 낙화암의 삼천궁녀,「저들은 그르고 나는 옳다,」는 신라사람 검군,
진주 촉석루의 논개. 밀양 아랑각의 아랑 그리고 제국의 멸망과 함께 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군에 맞서다 산화한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틴 황제나 몽고군에 맞서다 개봉에서 신민과 함께 옥쇄한 금나라 마지막 황제 애종처럼 역사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 옛날 요조숙녀와 군자가 서로 그리워하느라 전전반측(輾轉反側, 잠을 못 이루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 것)했듯이 더 많은 전전반측을 해야 한다. 젊은 날 작가 김동인이 종현(鐘峴)(명동)의 새벽 종소리, 시인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종소리에 전전반측했듯이 더 많은 전전반측을 해야 하는 것이다.
2013 0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