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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십자가(十字架)카테고리 없음 2019. 3. 28. 21:09
사람에게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는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아들과 나눠질 수 없고, 어머니가 딸 대신 질 수도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서 그리스도교는 이 십자가에 의해서 다른 종교와는 다른「고난의 찬양」이라는 특색을 가진다. 십자가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서 출발한다.
시대에도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다. 시대란 우리가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되어지고. 회피한다고 회피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지 그는 이미 시대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고 내밀한 것이 있는 것처럼 시대에도 까놓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있고 끝까지 고수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 살을 맞대야한다는 예언에 오이디푸스 왕이 운명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시대도 또한 운명의 지배를 비껴갈 수 없다.
사람이 시대를 수용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그리워하고 도자기가 도공에 순종하는 것에 비교된다. 대개 시대란 것도 세상을 닮아 좋은 것은 찰라지만 고난과 시련은 중첩되고 가중된다. 진달래가 봄을, 국화는 가을을 선택해서 피지만 우리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영국의 도시 브리스톨이나 솔즈베리란 이름으로 아메리카에 팔려가고. 릴리엔탈(백합의 계곡)이나 로스차일드(빨강방패)같은 고상한 이름으로 유대인을 차별했던 시대도 우리는 살았던 것이다.
시가 발달한다는 젊은 시대나 산문이 발달한다는 성숙한 시대에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늙고 병든 시대도 또한「조강지처」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시대가 전시대를 대체한 것처럼 우리의 시대도 다음 시대에 부정되는 것임에도 우리의 시대는 선산을 지키는「등 굽은 나무」였던 것이다. 시대가 핍진하여 비록 소크라테스를 죽이고 예수를 죽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산고(産苦)라는 것이 있어 두보라는 리얼리스트를 낳았고. 니체라는 천재를 낳기도 하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이나 중국 남명정권의 사가법은 왕안석처럼「나라의 은혜는 얕고, 오랑캐의 은혜는 깊도다.」란 말을 왜 못했을까? 과연 그들의 절개는 고뇌어린 것이었을까? 브루투스가 시제를 암살하고 미스히데가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불가피한 것인가? 그들의 행위는 숙려(熟慮)끝에 나왔을까? 수인번호 64번 이육사나 중국 청나라 말기「개혁을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하며 내가 그 처음이 되겠다.」고 말한 담사동에서 우리 시대의「십자가」는 멈춰서 있다. 아직까지도.
2012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