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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지도자」들에게카테고리 없음 2019. 3. 31. 17:04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개혁적인 무장(武將)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은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와까(和歌. 일본고대시가)중의 「세상살이 50년, 천하와 비교하면 너무나 하찮다!」라는 구절을 자주 되뇌었다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49세의 나이에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의해서 혼노지(本能寺)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비록 「야차의 부활」같은 사람이었지만 애송시구를 통해본 그의 내면적 풍경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짧은 인생을 살고 간다. 「이 또한 그러하리라.」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를 숙연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누구들은 관심의 대상은 같으나 관점이 다르기도 한다. 아, 세상의 온갖 나쁜 것으로 치부되는 「차이와 차별」은 사실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발하는 이유가 되고. 우리를 독특하게 하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공감(共感)이라는 것이 있고 공명(共鳴)이라는 것이 있으며, 동감(同感)이 있고 동의(同意)라는 것이 있다. 유교가 그 가부장적이라는 오명 속에서도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는 것은 「힘을 부정하고. 무력을 경시」하는 사상 때문이고. 불교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기림을 받는 것은 「생명존중의 가르침」 때문이다. 우리는 「자명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은 천하가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것들은 천하가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눈 밝은 사람」인 「조선왕조 500년」의 작가 신봉승은 「면앙 최익현 선생이 73세의 연치에 을사늑약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사람들은 천하동생天下同生이라 했고. 대마도에서 굶어 죽었을 때에는 천하동사天下同死라〉라고 해 큰 인물의 명멸과 관련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한 인물의 생사개념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의· 자유 ·균등 ·박애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 등의 진작과 훼손 등에도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일찍이 부처의 속가제자였던 유마거사(維摩居士)는 「중생이 병이 들면 나도 병이 들고,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하여 불교 특유의 공관적(空觀的)슬픔을 나타내었고, 지장보살은 「한 중생이라도 놓치게 되면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열반조차도 배격하였다 「천하를 자기 집 같이 보고, 세상을 한 사람 같이 본」대동설(大同設)의 왕양명(王陽明)에 이어 이탁오(李卓吾)는「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쳤거나 얼빠졌다고 하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나의 마음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쳐있는데 어떻게 나는 미치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은 얼이 없는데 어떻게 나는 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여 사람들과의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여주었다. 이것들은 모두 「하루살이 일생이나 800살을 산 팽조(彭祖)를 같이 보고, 순금 1g이나 1kg를 같이 본」장자(莊子)의 동등적 세계관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도 인류에게는 우리를 일깨워주고 우리를 바로잡아주는 지혜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돈 없고 빽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어떤 현상일까? 그렇다면 오늘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돌격, 앞으로!」하며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의 심성은 어떠한 것일까? 어떤 제도, 어떤 주의, 어떤 체제라도 인명을 우습게 알고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배첟되어야 하고 타도되어야 한다. 일당이나 일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한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한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옛날에도 「짐은 말랐어도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고 당태종이나 측천무후는 말하였다. 삼베옷을 걸친 이방원의 태종우(太宗雨)의 덕을 본 것은 조선의 백성이었고, 눈병 난 세종의 덕을 보는 것은 오늘날의 자판세대이다. 초나라 궁성에서 잃어버린 화살은 초나라 사람이 줍게 될 것이고. 장안에서 굴러다니는 금덩이는 결국 장안사람 어느 누가 줍게 될 것이다.
한민족의 누가 죽었는데 환호작약하는 것은 본래의 우리하고는 어긋난다. 한민족 누구들이 죽었는데 비통 침울해 하고 얼굴을 돌리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지도자의 품성이다. 적어도 지도자라면 「천하의 공생共生, 천하의 동생同生」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 본분이자 자질일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권세의 절정을 맛본 그가 죽음의 순간에 그리워하고 찾은 것이 어쩌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이 아니였을까? 오늘도 부벽루(浮碧樓)는 높고 연광정(練光亭)은 빛날 것이다.
2010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