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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이렇게 씌어져야 한다.카테고리 없음 2019. 4. 1. 22:12
요즘 우리 아이의 학교 도서관에서 단연 책을 많이 대출하는 사람은 아마 나의 아이일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보기 위해서 한 번에 대여섯 권씩 빌려오라하는데 그것이 한 달에 두 번 정도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오대산 자락의 궁벽한 산촌에서 책을 읽느라 호롱불에 반 쯤 자란 빡빡 머리카락을 자주 태우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고, 1970년 대 당시 서울사대 부고 작문 선생님이셨던 경동호선생님이 붙여주셨던 별명 「책벌레」는 이후 나의 별명이 되었다. 그 시절 못지않게 지금 다시 독서광이 되었으니 이것은 현대적 의미의 「산림에 거하는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호문(好文)은 너의 운명이리라.」는 오래된 예언의 실현일 것이다.
나는「주객일체」나 「이상향」이란 말을 처음 대했을 그렇게 신기해하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는데 지금도 글을 읽노라면 「독서는 광부가 보석을 캐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환희와 열정의 폭포수 세례를 받는 기분이다. 또 왕희지(王羲之)의 「옛사람 글을 대하면 한탄스럽고 슬퍼서 내 마음도 알 수 없게 되도다.」의 그것을 다시 따라가는 마음이고. 더군다나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서백의 주역, 공자의 춘추, 굴원의 이소. 좌구명의 국어. 손자의 병법. 여불위의 여씨춘추. 한비자의 세난과 고분. 시경의 삼백편이 모두 곤궁에서 발분해서 지은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글은 마음의 표현임에 지그시 눈을 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좋은 글을 사모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서인지 좋은 글에 대한 윤곽은 그나마 그릴 수 있으니 글이란 모름지기
_첫째로 인간의 지식을 넓혀주고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볼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를 충동하여 금과 유황향 그리고 프레스터 존이 군주인 동방의 기독교를 찾아 나선 것이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연 것처럼 글이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인간의 인식 확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_둘째로 독자로 하여금 일치의 기쁨과 공유의 즐거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이미 그 화자(話者)는 죽고 없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닮았다는 데서 동류의식과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이며 그것이 발전하면 서로를 알아주는 단계-죽었다면 해골이라도 마주보는-까지 된다. 같이 곱씹을 기억이 있고 무언가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허접한 것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_셋째는 화자는 물론이거니와 독자도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한다. 글을 읽음으로써 자연스레 응어리가 풀리고 재총전의 효과를 일으킨다. 감정의 이입과 감정의 투사가 화자와 독자간에 교차하고 신선전을 읽는 듯 홍길동전이나 장길산을 읽는 듯 통쾌하고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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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넷째 글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병을 앓게 해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책을 읽음으로서 마호멧이 되고 홍수전이 되고 최제우가 된다. 도저히 글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의 비밀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의 글에서는 시대고를 느끼게 되고. 다산의 글에서는 지식인고를 알게 되어 시대와 지식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도 알게 된다. 또 최명길의 항서에서도 그렇고 도선선사의 비기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최근 발견된 조선시대의 먼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원이엄마의 하늘나라 편지에서도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정경에 놓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_다섯째 글에서는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탁문군과 사마상여 홍랑과 최경창같이 세기의 로맨스일 수 있으며. 백아와 종자기 관포와 포숙아 같은 지음의 회포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달마와 혜가의 극적인 종교적 만남일 수도 있으며 괴도 루팡과 명탐정 홈즈 같은 괴안과 거인의 만남일 수도 있으며 한니발과 스키피오 제갈량과 주유 같은 숙명적 만님일 수도 있다. 하여간 우리는 책에서 나를 비롯한 삼각만남이든 인물들과의 직접적 대면이든 뭇 생각들의 만남에서 가슴속 깊이 포만과 충일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_여섯째 정신과 정신을 이어지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글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씻어주기까지 한다면 더 더욱 좋을 것이다. 진리정신에는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없고. 드높은 기상이나 곧은 기백은 인간의 자존심이며 깨끗한 마음과 동심만이 구원에 이르며 법열에 들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남겨줄 수 있는 것은 뭐래도 정신적 자산뿐인 것이다.
_일곱 번 째 이 글의 정곡이라 할 수 있다. 그만치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간과한 것이다. 최고의 글은 규정하고 정의하고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그림같이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켜주는 글이야말로 글 중의 글일 것이다. 나의 세계로 유도하고 우리 정파의 아젠다에 솔깃하게 하는 글은 글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손이 닿고 사람의 시선올 고정하게 하는 것은 진부하다는 것이다. 생각의 제한이나 생각의 금기를 두는 것은 더 이상 좋은 글이 아니며 독자를 자유케 하는 글이 정녕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고지신」도 비속하다 할 것이고 「법고창신」도 탈속이 아니라 할 것이다.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독자의 선택에 따르며 독자의 결정에 순응하는 것이 앞으로 글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앞서 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09년 5월 11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