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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문의 빗장을 열어본다.카테고리 없음 2019. 4. 1. 22:13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라는 틀은 많은 부문에서 인간의 지위를 높이고.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어떤 것은 놓쳐버렸고 어떤 것은 버렸으며 또 어떤 것은 덮어 버렸다. 이른바 현대의 트래킹 에러(tracking error)라 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방방곡곡 동네 어귀에 세워져있는 열녀문(烈女門 또는 정려문. 홍살문)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과연 현대와 열녀문은 시대의 충돌과 가치의 충돌에서 비껴갈 수는 없는 것일까?
탁문군(卓文君)!, 중국 한무제 때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있던 중 거렁뱅이에 가깝지만 거문고를 잘 타고 학식이 많은 사마상여에게 한 눈에 반해 춘정을 고백하고 야반도주하여 선술집 주모도 마다하지 않은 맹렬여성. 자유연애의 원조.
채문희(蔡文姬)!, 중국 삼국시대 대학자 채옹의 딸. 세 번이나 개가했다 그 표표한 삶이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게 하는 절창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과 시 비분(悲憤)을 낳게 만들었다.
하후영여(夏侯令女)!, 중국 위나라 때의 사람 하후문영의 딸로 조문숙이라는 선비에게 시집을 갔으나 그가 일찍 죽자 머리카락을 잘랐다. 곧 두 귀를 잘랐다한다. 조씨집안이 망하자 친정으로 돌아와서는 코마저 잘라 절부가 어떠하다는 것을 자연적 실증주의(온몸)로 보여 주었다.
도미부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등재. 그러나 자신의 이름 없이 누구의 부인으로 불리고 있다. 정절녀의 상징.
이외에도 많겠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정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사람들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보다는 시대적 요구를 따른 사람들을 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적에 탁문군이나 채문희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고 하후영녀나 도미부인은 질곡의 세월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분명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뒤에서 보는 것은 시합의 결과를 미리 아는 것처럼 누구나 말 할 수 있다.
하후영녀나 도미부인 같은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그것이 조선시대 과부가 개가하면 자손의 벼슬길이 막히는 제도의 함정이었든 토지만이 경제력의 원천이라 옴짝달싹 할 수밖에 없었든 불사이군 불사이부의 성리학이라는 강상론에 주입이 되었든 심지어는 대롱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든 간에 전부 억지 춘향이었고 억지 보살이었다고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성본위의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희생을 더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편과 자식은 그녀들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고 가치라고 알았으며 최선의 삶이라고 인지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호랑이 처녀와 김현의 탑돌이나 처용가, 백제의 정읍사, 고려시대의 쌍화점에서 볼 수 있듯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음양하는 까닭이지만 이를 뿌리치고 절개를 소중하게 생각한 것은 -남자들을 리드한 탁문군이나 채문희의 삶 못지않게 -치열하고 격렬한 삶이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이지 봉건적 유산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서릿발 같고 찬 얼음 같으며 곧은 송죽 같은 정절은 병자호란 때의 주화파와 주전파. 열심히 공부만 하면 공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자학과 공부 이전에 도를 닦아야 한다는 양명학의 대립처럼 삶의 본질을 높고 고뇌하는 것으로 격상시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느냐는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고, 「전설따라 삼천리」류나 흥밋거리 3류영화류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교산 허균의 첫째부인 김씨가 허균이 공부를 하면 옆에서 바느질 하며 「나를 언제 숙부인(정삼품 당상관의 아내에게 주던 작위)으로 만들어 줄거냐?」는 아녀자의 꿈과 「조선의 마지막 문장가」라 칭하는 이건창의 첫째부인 달성서씨가 「시부모 앞에서는 미소를 잃지 않는 등 공손하다가도 자기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등 반듯했다.」는 술회에서도 보듯이 정답고 행실이 바른 부인 김씨나 부인 서씨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자 아내이고 또한 정절녀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삶이 권태롭다고 이곳저곳에서 자살자가 속출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들은 진짜 사랑을 했을 수도 있고 등신불처럼 살고 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결코 속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열녀문이나 열녀비를 보고 쉬 발걸음을 떼지 못하며 그녀들의 심사를 헤아려 보는 것은 봉건적 악습 속에서도 우리가 지금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그녀들은 절개도 세상의 향기이며 모든 인생은 서 푼 네 푼 값만 다를 뿐이지 다 지고한 것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9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