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두사 「국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카테고리 없음 2019. 4. 1. 22:14
엊그제인가 「국민가수보다는 여가수 인순이가 더 좋다.」는 여가수 인순이의 말은 오늘의 세태를 함축하지만 아마 몇몇 사람은 무척 고까워했을 것이다. 세상사는 공정치 못하면 사르트로 같이 노벨상조차도 거부하는 것이며 구색용으로 끼워 넣으면 민혜경 같이 가요상에 웬 의상상이냐고 돌아서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야만이 세상은 흠칫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등의 어마어마한 접두사가 누구에게 붙으면 사람들은 이리저리 따지고 요모조모 살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국민배우」 「국민가수」 「국민타자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어느 사람 앞에 국민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위치하려면 관록이나 인기. 기예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거기에는 We shall over come의 가수 Joan Beaz같이 인권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을 했다거나 브리지트 바르도같이 동물보호운동에 전념하는 신념은 물론이고 MS의 빌 게이츠같이 기부행위는 일상사가 되어야만 알맞은 이름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우리의 국민이라는 타이틀은 한 인간으로서의 성공을 축하하고 기리는 것이 아니라 되려 욕보이고 별로 아름답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라고 영웅을 많이 배출하고 외화를 많이 획득하며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국가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사람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유방백세(流芳百世)」같이 아름다운 행적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변덕스러운 인심(人心)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는 외화내빈하는 인간의 취약성에 영합하는 것이자 자가발전적 성격이 짙고 상업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리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몇 사람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국민」은 오늘도 고생이 많고 「국민」은 뻥튀기되고 부풀려진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나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당사자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얼핏 영예인 것 같지만 실은 족쇄라고 왜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무릇 세상의 이치는 햇볕이 강하면 응달도 따라 짙은 것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노라면 양반이 바로 국민 가수이고 국민배우 누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 자의적인 여성을 뺀 대다수의 여성들이 열녀문을 보고서 받았을 강박감도 이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그런 소리를 들으면 확성기를 틀고서라도 해명을 해야 하거만 그렇지 않은데서 우리는 미필적이라는 인용의 자세를 볼 수 있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데서 그가 이제는 박제됨을 원하고 화석으로 사라지는구나 하고 우리는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국민 」누구라는 것은 만인의 눈총을 받고 만인의 시선을 모으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렸을 적 집안이나 고향에서 촉망을 받아서 청장년기에는 그것이 몹시 몸에 부담이 되었으나 나이 50을 넘고 6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사회적 성공과 관계없이 홀가분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국민이라는 현판을 떼어내서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접두사가 앞에 붙으면 기대감을 갖는 동시 그 세뇌적 기획적 성격으로 인해 저항감을 가지며 수도사적 절제와 고행을 요구하고 살아서는 성웅이나 위인은 경원(敬遠)의 대상이지만 「인간 이순신」 「인간 유관순」이 더 정답고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는 접두사는 살아서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며 죽은 뒤에 추증되고 추존되어야 할 이름이지만 그것이 횡행하는 데에서 시대의 가벼움, 시대의 빈약함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2009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