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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편애는 Pax Romana나 Pax America를 낳고. 국가의 편애는 금수강산 (錦繡江山) 대한민국이 우뚝하다. 운명에 대한 편애는 일찍이 육두품의 최치원이나 「시대와 운명이 모의」했다는 한퇴지에서 자진모리를 만나게 된다. 사람에 대한 편애는 조조의 3남 조식이 형수 견부인에 대한 사랑으로 오늘도 애잔함을 일으키고, 공자의 안회에 대한 사랑과 남명 조식의 정인홍에 대한 사랑은 도통의 전수임을 알 수 있다. 아! 기생 홍랑의 최경창에 대한 사랑은 정실부인들도 가까이 못할 끔찍한 사랑이었다. 편애의 힘인 것이다.
편애는 사랑의 편중현상이다. 사랑의 축이 기울고, 편차가 커지는 것이다. 일찍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가슴에 둘렀다는 마법의 띠 「케스토스 비마스」에 묶인 것처럼 애정이 솟아나고 경향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 띠를 두르지 못하면 상실감이 더 크고 이 띠를 두른 사람은 감읍하고 감격한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에서 선비와 여인은 이것과 눈이 맞은 경우이다. 종종 왕조가 바뀌고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며 하늘의 공기가 달라진다. 편애의 작용인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사랑은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다. 모니카의 어거스틴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로서의 구원의식(救援儀式)일 것이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가 8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계비 강씨와 늦둥이에 대한 애틋함의 표현일 것이다. 고려의 유신 정몽주나 길재의 망한 나라에 대한 서릿발이나 성삼문의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대한 집요함이나 위징의 당태종에 대한 매서움은 인간의 편애가 왜 단심(丹心)을 낳고, 꺾일망정 구부려질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편애의 기능이다.
진리에 대한 편애는 루소의 「진리를 위해 신명을 바친다.」나 칸트의 「나는 나의 길을 가리라」는 선언에서 다툼을 불허한다. 광기의 철학자 니체가 방랑의 신 디오니소스에 빠지고, 관념의 철학자 헤겔이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흠모함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유전자이다. 공자 맹자를 같은 지향점으로 두면서도 상반된 의견을 내놓은 주자학파와 왕양명학파를 통해서는 같은 성현의 문도이므로 결국은 같아질 것이다. 서천(西川)에 대한 소동파. 도산(陶山)에 대한 이황, 무이12곡에 대한 주희, 화양9곡에 대한 송시열의 안목은 사람과 경관이 모두 이름이 드높여지는 경우이다.편애의 역할이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편애가 독생자의 희생에 의해서 최고조에 달한다면 「내가 무엇이 관대 나를 이렇게 생각하십니까!」에서는「무조건적 항복」을 연상할 수 있다. 또 못난 자식이나 막내자식 또는 장애자식에 대한 부모의 편애는 「탕자나 잃어버린 1마리 양」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거역할 수 없는 정서이다. 그러나 그 알뜰한 편애도 위정자를 만나면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조선 초기 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고.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한 것도 태조와 선조의 편애가 심술을 부렸다고 볼 수 있다. 편애의 난해함이다.
헬레나를 사랑한 파리스 왕자는 트로이 섬을 환란으로 몰고, 양귀비를 사랑한 당현종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오로지 권력을 탐애한 대원군이나 자희태후는 차라리 권력에의 접근이 봉쇄됐어야 했다. 전체주의로 똘똘 뭉친 히틀러나 스탈린. 일본의 군국주의는 역사의 암이었다. 왕조시대 퇴폐적 소수층에 대한 편애와 무지렁이들에 대한 학대는 오늘도 다른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다. 악정의 대명사인 걸(桀) 주(紂)나 루이 16세, 니콜라이 2세, 의자왕이나 연산군의 몰락은 편애해서는 안 될 것을 추종하고 편애할 것을 외면. 무시. 배척한 탓이다. 편애의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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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오늘은 현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