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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여겼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생각은 미우나 고우나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현실인정론이나 불가피하고 수긍하고 또 수긍하는 운명애적 차원은 아니다. 글을 써보거나 명상을 해보거나 거리에서 또는 생활의 터전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실재적 입장에서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고 사유한 모든 것 - 금전이나 건강문제부터 사회적 마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 갖가지 고초와 난관 심지어는 살면서 당하는 황당함까지도- 나의 자양분이요 나의 재산이라는 이른바 부(負)의 자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독일의 근대 형법학의 개척자 Feuerbach의 「심리강제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선호하는 공리주의적 경향이 있다. 이왕이면 한 세상 살면서 편안히 살기를 원하니 무병장수나 불로불사에 대한 인간의 오랜 염원도 이것들의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고난과 고통을 피해갈 수 없고 그것이 일정 부분 우리 삶을 점유한다면 더 이상 혐오하기보다는 고난과 고통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가치를 지니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성숙된 사고이고 우리 인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자세일 것이다.
나는 때로는 스스로의 직관에 의해서 또 어떤 때는 지인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이 사람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며 인생을 180도 바꾸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고난과 고통이 사람 삶의 질을 따지게 하고 사람의 내면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등 사람의 생존능력을 높이고 생명능력을 강화시키는데 긴요하다는 것이다. 진실로 고통과 고난은 사물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존재하고, 사물을 영화롭게 하는 전제조건으로서도 존재하지만 사물의 적응능력을 강화시키고 보호본능을 한층 자극 한다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이 이치는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를 비롯하여 단체, 정당, 민족, 국가 등 개념을 이루고 가치를 만드는 모든 집단에도 광범위하게 해당한다고 볼 것이다. 그동안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고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며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조차 싫은 비참, 절망, 나락 등이 저마다 까닭이 있고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좁은 소견으로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상을 「고해(苦海)」라 따라하거나 「험한 세상」이라고 따라 말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이 쇠가 담금질함으로써 더 단단해 지는 것처럼 이런 것들로 인해서 행복이나 안녕의 가치나 무게가 더 나가고 소중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먹이사슬관계에 있는 잡아먹히는 물고기(피라미)는 잡아먹는 물고기(메기)를 풀어놓으면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더 빠릿빠릿하게 물살을 가른다는 학자들의 실험 결과나 이따금씩 신문에서 복권 당첨 등 불로소득으로 횡재한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번 사람만큼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 일하고 돈을 번 사람들의 뇌가 더 활발히 자극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입증하는 몇 년 전 미국 메모리얼 대학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생명의 위협이나 힘든 일이 사람을 방심하지 않게 하는 등 전체적으로 생명의 조건들을 강화시킨다는 논리의 가까운 증명일 것이다.
또 군사 전술로써 한나라의 한신(韓信)이 「배수의 진」을 쳐 군사들로 하여금 결사적으로 싸우게 하는 방법이나 Caesar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며 회군할 수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들의 활용법이라면 바이킹족이 일찍이 브리튼 섬을 거쳐 Columbus보다 먼저 북대서양과 그린랜드로 진출한 것이나 몽고족이나 만주족이 원,요,금,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한 것도 척박한 자연조건이나 열악한 물산 등이 인간의 하고자 하는 노력과 결합될 때 무기가 되고 자원이 되는 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왕년의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에서 주인공이 화가 나면 헐크가 되어 괴력을 보여주거나 「염력이 강하면 이룬다.」는 우리나라 옛말도 극한상황이 주는 긍정적인 면이라면 전복에 상처를 내야 영롱한 진주가 생기고, 상처 난 꽃이 향기가 더 진하고 소나무가 쓰러져야 봉양이나 관솔이 생기는 것은 한계상황에서 대반전이 일어난다는 또 다른 면일 것이다. 나의 이 지적은 「고난 없이 영광 없다.」는 단순한 이중부정법의 레토릭이 아니라 영광이나 영예는 고난과 고통 없이는 그 의미가 반감되거나 아예 가치조차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은 사랑인데도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평범한 앎으로서가 아니라 삶속에서 체험을 통하여 절대자의 존재를 알게 하려는 의도」라고 말한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의 N B Walsh의 입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시련이 나를 강하게 했고, 협박이 나를 담대하게 했으며, 고통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말하나 나는 실패자라 선뜻 그 말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누구는 고난이나 고통을 인생과 동거하며 인생의 한 부분 이라는 「공유의 사고」를 내 세우기도 하나 나는 그저 먼발치에서 헤아리는 처지이다. 심지어는 고중미(苦中美)나 고중락(苦中樂)을 얘기하나 나와 같은 범부에게는 앞으로는 몰라도 지금은 버겁기만 하다. 시장바닥에서의 호객소리나 싸우는 소리, 병원 중환자실에서의 환자들의 비명소리까지도 생명이 자라나고 꿈틀거리는 소리로 알 수 있다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가려 달라.」거나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숨을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친밀감을 보내고 우애를 표시하는 등의 능동적 접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아랑곳 하지 않고 생명력의 한 축이요 생명의 또 다른 동력임을 안다면 사람들은 곤궁과 핍박 앞에서도 「잘 익은 술처럼 숙성되고, 오랫동안 읽히는 책처럼 친근하며, 풀을 먹여서 까칠 까칠한 모시옷을 입은 것처럼 단아」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당장 배가 고프고, 자살 외에는 달리 선택이 없고 팔, 다리를 자르는 대수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이 무슨 보탬이 되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따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고난과 고통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이론적 접근을 모색하여 고난과 고통이 완화되고 경감되며 지금까지의 기쁨과 즐거움을 2배로 높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면 반드시 시도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토요일, 일요일 산에 올라 시원한 계곡바람을 맞으며 산수가 주는 풍광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것도 월,화,수,목,금요일의 수고로움이 있기 때문이요, 한가한 날의 오후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정취에 같이 젖어드는 것도 다른 날의 분망함이 이 날을 지원하게 때문이다. 오늘날 개인이나 국가가 맞닥뜨리는 곤욕이나 어려움도 깊이 생각해 본다면「형이상학의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요 요식절차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Maeterlinck가 되어 「파랑새」를 품에 안아보는 꿈을 꿀 수가 있을 것이다.
2007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