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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사(突然死)와 예정사(豫定死)카테고리 없음 2019. 4. 6. 15:35
1.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어야 한다. 시저 같은 영웅도 왕소군 같은 미인도 이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했으면 멸해야 하는 것은 천하의 이치이고, 세상에 태어난 기쁨 못지않게 언젠가 죽어야 하는 비애를 안고 사는 것은 상대적 세계에 사는 존재들의 숙명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에녹이나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려갔다 하고 옛날 동양의 도교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라 제대로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의 불사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죽기 때문에 현생이 아름답고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등의 「하오련만」 류(類)는 사전에서 없을 것이며, 「易水寒 風蕭蕭(역수는 차고, 바람은 쓸쓸하구나.)」 같이 사람의 애를 끊는 소리도 없을 것이고 「한없는 이 즐거움을 시로서 읊어나 보리! 」란 조맹덕의 호연지기도 사그라졌을 것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장엄한 교향곡도 삶보다 장엄할 수 없고 세상의 온갖 기암괴석이나 기화요초가 경이롭다하나 생명력만큼 경이로울 수 없는 것이다. 계백장군이나 정몽주는 죽을 때에 죽었고 죽을 자리에서 죽었고 죽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항의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이 3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얻고서 죽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을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 도사나 철학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하학은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보통사람들의 한숨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이다. 죽음이 인간에게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이 있으니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살아온 날들이 꿈만 같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운명의 때에 수구처심(首丘初心)의 마음을 갖게 하는데 있다. 확실히 죽음은 절대 권세로써 사람을 뒤돌아보게 하고 지금 위치를 살피게 하면서 참회를 하게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시의라는 것이 있다. 때를 놓치면 복은 화가 되고 길은 흉이 되는 것이다.
2.
온갖 풍상 속에 고목이 된 주목은 인간이란 단지 앞서가고 뒤서가는 차이일 뿐 오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았다. 오늘날 같이 집을 나서면 온통 사지라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전적으로 요행에 의하고 안녕이라는 말이 요즘 들어 성가를 높이는 때에 우리는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장차 그럴 것이라고 떠올린다. 그런데 아주 드문 경우를 빼고서 하늘은 다행으로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항시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다. 상대적 세계에서 상대적 존재인 사람은 죽음을 지연시키거나 천연시킬 수는 있어도 기피하거나 회피할 수가 없다. 그 죽음은 어느 날 작전이 걸리듯 전격적으로 오고, 벼락이 떨어지듯 불시에 엄습하기도 한다. 또 그 죽음은 한발에 논바닥이 갈라지거나 건조함으로 나무가 말라비틀어지듯 애타게 오기도 한다.
전자가 갖가지 비행기 선박 자동차 화재 지진 쓰나미 심장마비 등의 사고로 급사하는 경우인데 이는 통상적으로 삶이 종전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정이 무참히 깨지는 경우이다. 집을 나서면 언제 불귀의 객이 될지 모른다는 것의 현실화인 것이다. 후자는 노환으로 회복을 바랄 수 없다거나 생물적인 수명이나 기력이 다 하였거나 각종 암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이 정해진 경우 등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임박한 상태를 가리킨다. 나는 평소 급사와 선고된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부질없는 것이지만 만약 내가 죽음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취할 것인가? 신 앞에서는 돌팔매질 당하는 개구리 같은 신세로서 건방지게 보일 것이고 죽음의 고통을 언어로 재단한다고 비난도 할 것이지만 나는 사람의 아들로써 위엄 있게 살다가 위엄 있게 죽는 것이 지론이기 때문에 죽음을 밝히고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2가지 죽음의 형태가 내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도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했어야 했다. 1996년 10월 어느 날. 장인어른께서 해난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급작스러운 죽음이라면 그 다음해 나의 형님께서 악성종양에 걸려 서서히 죽어야 하는 참혹함이 또 하나의 죽음인 것이다. 막연히 남의 일로서만 알고 학문하는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직접 당사자가 되고 시말을 보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나의 장인어른께서는 생각이 많으시고 잔정도 많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장모님이나 나의 아내를 비롯한 처남 처제들에게는 청천벽력의 일인 것이다. 평소 건강하셨고 나도 80세까지는 무난히 사실 것이라 여겼었는데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처참하게 깨진 것이다.
3.
평소 그 분의 생각을 아는 나로서는 만약 당신의 죽음을 1시간 전에 알았다고 한다면 장모님이나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들을 폭포수처럼 하였을 것이고 그 경황에도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들먹였을 것이며 그러고도 아마 일몰 때까지 상두꾼들의 발목을 꼼짝없이 묶어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언 한 마디 못하고 가시게 되는 장인어른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배뱅이굿이 왜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지금 돌아가신 분의 심정을 투사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신 분이나 살아남은 사람과의 사이를 거짓말처럼 싹뚝 단절 시키는 것이다. 나의 형님은 불치의 병이라는 간암에 걸려 진단에서 사망까지 7개월을 병상에서 보냈다. 100 명중에 7~8명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는데 제발 그 행운 속에 끼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지만 끝내 행운을 붙잡지 못했다.
내가 동생으로서 겪어보니 형님의 병마로 인한 극심한 고통은 차마 못 볼 일이고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곤은 너무나 혹독하였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있을까 생각했고 이게 바로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비껴가고 나쁜 것만 골라서 모조리 오는 것 같아 숨 막히는 날들이었다. 더군다나 형님이 종교가 있어서 절대자에게 의탁을 한다든가 평소 사생관이 뚜렷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연함이라도 있으면 바라보는 나도 적이 위안을 가질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데서 오는 형님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생각하니 내게도 그것이 전이되면서 나도 극도의 공포와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돌연사나 예정사를 운위한다는 것이 그 자체가 버겁고 어려운줄 알지만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뭔가 관(觀)이 생기면서 나름대로의 체계가 서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돌발사든 예정사든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대비하고 있다면 그 어떤 죽음도 본인이나 가족에게 주는 충격이나 슬픔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돌연사는 너무나 원통한 죽음이다. 사람들은 원통하다는 의미를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하고, 들었으면 하는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할 때 생기는 감정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 각종 위험에 노정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평소 일상생활에서 가족들과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심지어는 사후에 대한 안배까지도 생각하는 치밀함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예정사는 사람의 피를 말리는 죽음이다. 사람은 언제가 죽어야 할 존재지만 그 죽음이 수치상으로 보일 때 하늘이 노랗고 깜깜한 법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고 선채로 돌이 되는 경우이고 눈물도 마르는 경우이다.
4.
얄궂고 짓궂은 운명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숱한 전란이나 변고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을 때 한 것처럼 주저앉아 땅을 치며 꺼억꺼억 우는 것뿐이다. 죽음은 도둑 같이 올 수도 있고 ,만인이 다 알게 선포되어 오기도 한다. 문제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가야 한다는 데 있다. 죽음의 문제에서만은 우리 모두 도사가 되고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불꽃처럼」은 꼭 사랑에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죽음에도 쓰는 단어인 것이다. 마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마치 전혜린처럼- 생에 대한 애착과 성실은 바탕이고 더 나아가서는 죽음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음의 방법만 다를 뿐 죽음 앞에서는 진퇴양난인 우리 인간으로서는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살 때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장수하게 하고 발복하게 하고 원숙하게 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죽음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하고 자제할 줄 알아 인생도 풍요롭다는 것이 앞서서 산 사람들의 의견인 만큼 우리는 죽음의 명상이나 죽음의 의식을 통해 다정도 병약할 정도가 되고 다감도 익애할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나는 비록 죽지만 나의 자식은 계속 살아갈 것이고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인류는 최후까지 남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도 영원하고 인류로서도 영속하는 것이다. 나는「보아라. 사망아. 네가 사람을 어찌 할 것이냐. 사람이 이 땅에 산 이래 네가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위협하였지만 네가 어쩌지 못하는 사람도 너는 보았을 것이다. 사망아,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삶은 값지고 소중함을 아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는 너의 공로라. 생명이 덧없다면 사망도 덧없음을 사람들은 이제 알았노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석선생은 「이 생명은 가짜생명이다. 하늘나라에는 참나가 들어간다. 이 가짜생명은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짜생명을 연장 시키는 데만 골몰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고 오늘도 하늘에서 역설하고 있다.
2007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