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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 2019. 4. 9. 19:07

    박수근 화백의 그림「시장의 여인들」이 25억에 낙찰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수준 높은 오페라를 감상하려면 60만원도 아깝지 않다한다. 굳이 상업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 노고와 수고에 대한 대가요 보상이라고 이해한다. 이제 돈이 없으면 고급문화에로의 접근이나 향수(享受)는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문화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문화의 양극화도 확대되고 있다. 부유층(우리나라에는 상류층이 없다)은 문화적으로 더 부유해지고 하류층은 문화적으로 더 빈약해 진다. 나는 경제적 차별은 참을 수 있어도 문화적 차별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문화의 중심에 문학이 있고 문학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던가.


    글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의기를 느끼게 하고 정신을 일깨우며 정서를 순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른바 글의 미학이다. 몇 사람이 소유할 수도 없고, 몇 사람만이 알아보는 것도 아니며, 몇 사람만의 값싼 취미도 아니고, 몇 사람만의 농간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큰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대욕은 무욕이라.」. 스스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다. 글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 살면서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도 이와 같고, 물고기에 있어 물이 치명적이고 사활적인 것처럼 글도 사람에게는 정신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사활적인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국 건안문학의 대표요 북위(北魏)의 황제인 조비가 표현한 것처럼 「글 쓰는 일이 천하에 제일가는 일이요. 만고에 길이 남을 유일한 것이다.」에 참여하는 대단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미의식에 눈 뜨게 하고 , 자유와 평등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기도 하며, 기술의 발달과 산업의 진흥에 이바지하기도 한다. 오늘날 오프라인나 온라인으로 글들이 넘쳐나나 글다운 글이 없다고들 한다. 그것은 글 속에 정신이 없고 격렬함이 없기 때문이다. 글이 사람을 감동시키며 감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글이 숨을 쉬어야 한다. 글이 숨을 쉰다는 것은 금기가 없고 상상력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글들이 왜 고전이 못되고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은가. 그것은 내 글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반대급부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란 유감스럽게도 새벽녘에 한 마리의 개가 짖어대면 동네의 온 개들이 다 따라 짖는 것처럼 부박하고 표리가 다르며 변심을 잘한다. 평판이나 명성 또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마음을 주고 뜻을 바칠 수 없는 것이다. 글 쓰는 것은 마치 선행과 같아 하늘이 알아주면 만족하고 나를 기쁘게 하면 다행인 것이다. 글의 이해도 글을 쓰는 것과 같아 고도의 지적 성숙과 안목이나 식견이 요구되는데, 지음의 백아가 종자기를 위해서 기쁘게 거문고를 탄 것처럼, 황진이가 화담선생을 위하여 즐거이 가야금을 뜯은 것처럼 공급자와 수요자간의 역사적인 해우나 우주적인 조우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글은 쓰는 사람은「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강도를 만나 길에서 죽게 된 사람을 신분이 높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으나 사마리아인은 치료하고 구휼을 해 주었다. 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동정과 연민의 정이 넘쳐야 한다.

    오늘날 박식하고 유식한 글은 많으나 사람들이 소 닭 보듯 하는 것은 거기에 애씀과 번거로움이라는 실천력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글을 쓰는 사람은 어짊이 있어야 그 글에서도 어짊이 묻어나와 사람을 울리고 산천도 울리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요즘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달마부터 혜능까지」시리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구도자의 심정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혜가단비(慧可斷臂)라 하여 혜가가 달마에게 와서 제자를 청하니 달마는 「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리라.」하매 혜가는 칼로 자기의 왼팔을 잘라 백설(白雪)이 홍설(紅雪)이 되게 하니 달마가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글도 내 정신과 내 지향을 밝히는 것이다. 치열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걸 수 있어야 한다. 최남선은 문장보국(文章報國)이라 하여 글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했었다. 기필코 글로써 세상을 바꾸고, 기어코 글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발원을 하고 서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고독을 즐겨야 한다. 우리가 루소를 고독한 산보자라 하고, 장자를 소요인(逍遙人)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은 고독할 때 내면이 잘 보이고 이 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무장해제, 마음의 항복을 가져온다. 허공 같은 마음이다. 사람의 정신은 오로지 하늘밖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아야 하는데 고독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독에서 정신은 마음껏 유영(遊泳)한다. 뼈가 아프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생병(生病)을 앓아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았다(마호멧과 홍수전).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애써 군중과 더불어 하지 않으며 일부러 다중과 함께 하지 않는다.

    누가 있어 글 쓰는 사람을 혼자 있게 하는 것이 예의이고 예우이다.


    글 쓰는 사람은 고통이나 고난이 그 사람의 지적능력을 강화시키고 사고력을 확대시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의 고통은 여러 사람들의 행운이다」라는 말은 이것을 다른 쪽에서 본 것이다. 어느 현인은 「고통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했다. 「고통을 빼놓으면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길을 영원히 잊어버린다.」고도 했다. 「식물은 환경과 영양이 좋으면, 자신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또 새가 땅위에서 공격해 오는 짐승이 없으면 그만 날아오르는 비상력(飛翔力)을 잊어버린다.」고 하면서 「사람은 근심 걱정에서 진리정신이 살아나고, 평안하고 즐거운데서 진리정신이 죽는다.」고 했다. 천하의 공자도 자리가 따스해 질 겨를이 없었다는 말은 오늘에도 뭇사람에게 통용된다. 고 김상옥 시인은 이외수가 신인문학상을 탔을 때 이런 당부를 하였다.「글 쓰는 사람에게 오기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글이 쓰여 질 것인가. 고통이 닥치고 불행이 닥치는데 비굴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오직 오기 밖에 더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다석사상」과 「고미술품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낮은 위치에 처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는」정신으로 나타나고, 「세상의 기쁨 세상의 즐거움 세상의 좋은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그러나 괴롭고 슬플 때는 나와 같이 괴로워하고 나와 같이 슬퍼합시다.」의 마음으로 보여야 한다. 사람이 전 생애는 이렇게 못산다고 해도 몇 번은 꼭 그래야 한다. 「천하 사람보다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보다 뒤에 낙을 누리겠다.」는 선인의 말은 이 정신의 철저화인 것이다. 이것은 「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으나 꽃은 뿌려주겠다.」는 소월의 마음이며, 「나, 가진 것 꿈 밖에 없어 끔을 드리오니 사뿐히 밟으소서. 내 꿈이오니」의 예이츠의 생각이다. 글 쓰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갸륵한가.


    글 쓰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자립해야 한다. 맹자의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 말은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돈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글의 훼절이고 글의 변절이며 글의 곡학이자 글의 아세이다. 나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돈을 받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이미 바탈(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자유로움인 것이다. 속박되고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의 얼굴이 구리 빛이고 손바닥은 꾸덕살(굳은살)이 있어야 생명의 소리가 나오고 절실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왜 문약(文弱)인가? 삶에 기초하지 않고 삶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도연명이 귀거래한 것은 농사라는 노동의 기쁨도 있었지만 정신의 독립, 사유의 자유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그의 시 「쉽게 씌어 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하는데 시가 쉽게 쓰여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중국의 시인 가도(賈島)는 퇴고(推敲)라는 말의 유래가 말하는 거처럼 시구 하나를 선택함에 있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있어야 하며, 고뇌의 빛이 어리어 있고 성실함이 배어있어야 한다는 문학적 동의이자 사회적 합의인 것이다. 글이 이러할 적에 그 설득력은 배가될 것이며 그 나타나고자 하는 바는 정곡에 근접할 것이다. 왜 사람들이 글을 혈서(血書)를 쓰듯 써야하며 항서(降書)를 쓰듯 써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글이란 결국 생명력의 확인이자 생명력의 연장인 것이다.

     

    2007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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