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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이래서 하는 것이다카테고리 없음 2019. 4. 9. 19:29
요즈음 일제 식민지 당위성이나 일제 식민지 불가피론이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건국초기 북한이 남한보다 항일운동의 정통성이 더 있다는 의견이 있어왔고, 장준하 선생 같은 독립군 출신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을 이루었으며. 지금의 노무현 정부가 상해임시정부를 강조하고 과거사 진상조사를 한다고 해서 항일과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것은 민족과 국민을 업신여기는 수구들의 준동이자 책동이라 볼 것이다. 이는 역사를 제 구미에 맞게 재단하고, 자청하여 패배주의적 사관을 갖는 것으로서 기생(寄生)주의적 역사관이라 아니 할 수 없고, 마음에 안 들고 내 편이 아니라고 스스로 비하하고 천대하는 것이며, 상대방이 아무리 훌륭해도 무시하고 눈 아래로 보는 협량한 놀부적 심성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을 의식의 미분화나 무명(無明)이나 지적 수준의 얕음으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이들이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고 내가 도달하지 못한 심오한 우주론적 이야기를 한다고도 볼 수 있고, 차라리 인류애와 박애정신에 투철한 것이라 간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도 젊음을 희생하여 나라를 지키는 우리의 아들딸을 보거나 일제 때 의병활동이나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선열들을 생각하노라면 아무리 오늘날이 가치부재의 시대요, 규범부재의 시대라 해도 이는 듣지 말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 기괴한 일인 것이다. 그때 국권상실에 항의하고 나라를 찾으려고 풍찬노숙한 것하고 오늘 휴전선을 지키는 우리의 국군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차이라면 시대와 위치이지 그 지향점은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오늘도 산업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많은 사람들도 넓게는 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었고 헌신이라고 봐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 유전자들이 강해서 살아남았든 비겁해서 살아남았든 오늘날의 사람들이 내가 못한다고 대의(大義)를 무시하고 애국자들을 홀대한다면 장차 일제의 침략 같은 것을 당한다면 뉘 있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고 선구자가 될 것인가? 식민지를 미화하고 호도하는 것은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언어도단인 것이다.
식민지 미화론이나 식민지 불가피론은 으레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며, 자존하고, 불의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정신이다. 정체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며 얼굴에서 얼굴로 남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체감이고 동질의식이다.
그런데 일제를 수용하는 것은 불의에 무릎 끓은 것이고, 침략에 영합하는 것이며, 군국주의와 야합하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데 밸도 없이 해바라기처럼 향일적(向日的)으로 살겠다는 것이고, 식물인간이나 식물국가, 온상인간이나 온상국가로 전락하겠다는 것이다. 어찌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우리의 기림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침에 과일 3 개 저녁에 과일 4개를 줘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노예적 발상이고, 굳센 기상이나 늠름한 기백이란 말이 무엇 때문에 있으며, 얼이나 혼은 어느 때 필요한지를 모르는 말인 것이다. 그 논리는 중심인으로 살지 않고 주변인에 머물겠다는 것이고.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며, 천명(天命)이나 영성(靈性)을 모르는 약육강식만 보아온 짐승의 생존방식이지 염치와 예의를 아는 인간의 논리는 아닌 것이다.
또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지상주의이자 결과최고주의자들의 생각이고, 정신은 저당 잡히고 박제화 되었으며, 물질 (빵 부스러기)에 희색을 하고 반색을 하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의 포로로 살겠다는 것이다. 작은 악은 더 큰 악을 불러오니 그것은 전체주의와 획일주의로 연결됨으로서 다양성과 다채로움, 공영, 공존, 공생을 부정하고, 인간의 고유성. 독자성, 창의성, 자율성을 말살하는 반민주, 반인간적인 사고인 것이다. 거기에다 상대주의 철학을 가짐으로써 「힘이 정의이다」라는 소피스트들과 궤를 같이하고, 나치에 협력한 칼 슈미트나 유신헌법을 찬양한 학자들의 부류인 것이다. 그러니 입장이 바뀌면 언제든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으고, 배반과 변심은 주특기이니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
자고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상적인 삶은 무엇이며 이상적인 인간은 어느 인간인가? 우리가 왜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며, 고전을 탐독하고, 우주를 조망하는가? 그것은 곧 구경각(究竟覺)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인간의 최고상태가 「독립불기(獨立不羈)」의 상태라고 보고 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외쳤다는「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그것이고, 원효대사가 추구한 「무애정신」이 그것인 것이다. 사유의 사통팔달이요. 정신의 독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자아확립은 그것이 더 진전되고 심화하면 민족과 국가로까지 발전하니 민족도 민족실현이나 국가확립 등으로 공동선이나 최고선이라는 가치나 덕목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이나 최고선도 독립불기의 정신이나 상태에서 오니 우리의 선조들이 식민지를 기어코 탈피하여 독립된 나라를 갖고자 하는 소이인 것이며 우리가 자주적(自主的)이 되고 자결적(自決的)이 되어야 하며 자존해야 할 이유인 것이다.
스스로 존귀할 줄 모르는 국민이나 나라는 천대받고 학대 받을 수 밖에 없고, 인권이 유린되고 국권이 상실되는 데도「가만있고 잠잠 하라.」는 것은 현실긍정이 아니라 용기 없는 자의 넋두리인 것이다. 역사란 도전 속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자극과 고난이 개인이나 민족을 단련시키는 것이라면 역사와 하늘의 안배로써 그 도구로 쓰일 뿐인 일본제국주의를 목적으로 알고 우상으로 아는 것은 착각이자 이런 때 쓰라고 어불성설이라는 말이 또 있는 것이다. 자주적이고 자결적인 생각은 내 인생이나 내 민족, 내 나라를 외부의 강제 없이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여기에는 「산이 있어 산에 오르는」 것처럼 경험이전의 문제이고 지식이전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빛을 발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다. 의미를 심어주고 의미를 받아들이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완미이며 순수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쾌한 것을 피하고 안락한 것을 취한다.」는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아무나 의사(義士)가 되고 열사(烈士)가 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동포애가 있어야 하며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저항정신과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못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고,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불복종과 비폭력으로 인도의 독립을 꿈꾸었다. 영국에 대한 협조는 독립의 방법이었고 그에게 있어 조국 인도의 독립이야말로 가장 큰 진리의 실험이었다. 나는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을 바란 우리의 선열들도 간디 못지 않은 우국지사들이며 진리의 실험이었다고 감히 자부한다. 3.1독립운동을 폄하하는 소리에도 저들 마음의 협량함에 답답함을 느낀다.
3.1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별세계적인 우문(愚問)에 나는 민주주의나 평화나 정의는 시혜적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 역사적 법칙임을 지적해 주고 싶고, 아(我)라는 것이 그냥 오(吾)나 여(余)가 아니라 상대방을 전제하고 상정한 것이며 그것은 바로 「역사란 아와 비와의 투쟁」이라는 단제 선생의 언급은 치열한 고민과 깊은 사색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가르쳐드리고 싶다. 덧붙여 33인이 독립선언문의 기명 순서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자 남강 선생이 「이는 영광의 순위가 아니라 죽음의 순서입니다.」하면서 의암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지목하였다는 일화에서는 비록 세월은 흘렀지만 우리도 그 당시의 비장한 분위기에 젖어봐야 하고 웅혼한 뜻들을 새겨봐야 하는 것이다. 항일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건만 다른 것은 왜 오늘의 잣대로 보느냐는 힐난을 하는 사람들이 독립운동만은 왜 오늘의 잣대로 보는지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은 불필요하며 100% 자력의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도 서로간에 정신의 단절과 생각의 단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정신의 우위를 믿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며,「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늘의 것은 하늘에게」한 것처럼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각자의 분수를 찾는 것이 정의라면 독립운동은 이에 부응하는 것이다. 또 세계 각국이 식민지 상태를 선호하고 제국주의를 추종하더라도 우리나라만이라도 독립을 꿈꾸는 것이 깨어있는 민족이자 독서의 나라다운 것이 아닌가?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 아니던가? 나는 만주 벌판이나 상해 중경에서 항일투쟁이 없었고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시시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밋밋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을 하고 아무리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일을 벌였다 하더라도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되고, 의롭지 않고 바르지 않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에만 매여야 한다. 우리가 타락하고 미약해서 그렇지 모든 것은 자유가 그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꺼져야하는 현상보다는 속 깊이 포진한 본질을 보아야 하고, 본질을 보되 단순한 視覺(see)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관(觀,outlook)을 갖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리나 자유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 전제조건이자 전제상태인 독립불기는 자연법적인 것이고, 천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로 남도록 힘써야 할 것이고 우리는 자유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독립국가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2007년 5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