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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의 정치를 지향한다.카테고리 없음 2019. 4. 10. 18:43
올해는 대선이 있다 보니 이곳에서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언쟁하고
보수에서도 분화하고 진보에서도 갈래를 짓는다. 지지하는 당의 이유를 대고
옹호하는 후보의 사유를 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외면을 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언뜻 보면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쓸개에 붙고 간에 붙는 기회주의적
태도일 수도 있고, 난투극을 벌이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몸 사림일
수가 있으며,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가 가지 않는 고고함 때문일 수도
있고, 정치와 종교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경험적 지혜를 전수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언급한 것들은 피상적인 관찰이고 둘러대는 것들이다.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하 그것들을 상설해 보고자 한다.
1. 세상에는 완전완미한 것이 없으며, 인간은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며 ,무결점의
사람도 없다. 아무리 이유를 대도 흠이 있으며 아무리 변명을 해도 예전에 있었던
것이며, 아무리 해명을 해도 낯이 익기만 하다. 인간의 지식은 얕을 뿐만 아니라
지식으로 모든 것을 형용할 수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우리의 인식은 편견이나
그 밖의 생물학적 원인으로 제한되어 있다. 세상만사를 총람할 수도 없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도 언제 반증에 의해서 파기되며 다른 걸로 대체될 수가 있다.
안다는 것도 수박 겉핥기식이 많으며 변죽만 울리다 그쳤으며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었다. 거기에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귀에 듣기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생각하면 언제나 우리가 보고 판단한 것은 틀리기
쉽고 빗나가기가 쉬운 것이다. 특히 미꾸라지 같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하는
정치와 정치인에 있어서는 -경제학자들의 경제 예상이 언제나 틀리는 것처럼-
더 틀리고 더 빗나갈 것이다.
2. 하늘의 안배나 역사의 의외성은 우리가 예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과학적 수학적 원리이고 인간의 세계에서는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기도 하나 하늘의 묘리는 몽땅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복이 바뀌어 화가 되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는 것은 자주 목도하며
옥석(玉石)이 같이 불에 타는 것도 흔하며, 천도무심론(天道無心論)이 나올 만큼
공정성을 결하기도 하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할 정도로 과분한 혜택을 볼
수도 있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대롱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문틈으로 달리는 말을 보는 것과 같이 협량하고 빈궁하며 옹색한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의한 장기집권이 경제발전을 가져오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보존과 파종 기능을 한 것임에 반하여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은
지금도 그 나라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기존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역사에는 때로는 비약이나 의외성, 돌출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3. 흐르는 말은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는 노장의 말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살아갈수록 의미가 심화되며 확대되어 나타난다. 오히려 조치를 취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악수가 되고 패착이 된다.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라면
지름길을 택하든 우회로를 택하든 상관아 없으며 시간은 활용에 따라 내 것이
되기고 하고 상대방 것이 될 수도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고 불을 때면 반드시 연기는 나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이 선이 아닐 수 있다.
무용(無用)의 용이 귀함을 받는 까닭이다.
4. 사람의 평가는 관 두껑을 덮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일생에 수 없이 변하고 사람에 대한 평가도 승자냐 패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르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하고
복권되어 벼슬에 추증되기도 하며 시호를 얻기도 한다. 영웅이 반역자가 되고
사형수가 스타가 되는 세상이다. 살아있을 적의 평가가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
없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행적).
사람을 도덕성으로 재고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며 여러 사람(언론)이 지목하면
누구도 훼절이나 변절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여와 야, 또는 내각에서 사분오열되고 피터지게 싸워도 지구상에서는 한갓
달팽이 뿔들의 싸움이며 세계적으로 볼 적에도 한낱 사슴들의 뿔 시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시각에서 보더라도 찾잔 속의 태풍이요 한강에 돌 던지기나 다름없다.
오늘날 유력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역사와 시간이라는 강물은 무심하고 우리의 환희, 열광뿐만 아니라 억울함
원통함과 애증까지도 같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 담아 유유히 흐른다.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삼 하리요 뿐인 것이다.
6. 우주론적 관점이나 통시적으로 보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곡선이 우상향이든 우하향이든 -정상으로 수렴되고 원래대로 귀일한다는 것이다. 일의 진행 중에
마찰이 있고 알력이 있으며 충돌이 있고 대립이 격화해도 하등 대세에는
지장이 없으며 기복을 그리다가도 수평을 찾으며 꼭짓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시대정신이나 대의 등의 인도를 받거나 반대로 그것들에 떠밀리기도 하는 것이다.
될 사람, 되기로 작정한 사람. 되는 사람으로 점지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다.
7.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치철학의 빈곤과 정치력의 부재, 운영의 미숙과 인문학적 교양의 빈약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대통령의 개헌발의는 철저한 인(人) 의 정치의
전형적인 실패라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지도자가 노대통령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숱한 실정에도 이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세계경제의 호황과 불충분하고 미비하지만 제도의 덕분인 것이다.
8.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되고, 쑥도 삼대 밭에서 자라면 반듯하게
자라난다.」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다. 환경 법령 제도 기구 등의 시스템(system)을
중시하고 전통이나 규범, 문화 인화(人和) 등의 정신적 가치의 영향력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정치의 발전은 처음에 무당이나 제사장에 의한 신정에서 강력한 왕권에 의한 왕정으로 또 공화정에서 더 정교한 민주정으로 발전하였고 인치에서 법치를 지향한다.
과학이나 예술 방면에서는 영재가 있어야 하고 천재가 필요하고 스포츠에서도
때로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하나 안정성 지속성 통일성 연계성이 중요한
정치 분야에서는 오히려 팀워크가 필요하고 협업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우대 받을 수가 있다.
전쟁 등의 혼란기에는 특출한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이것도 사람이 아닌 비상대권 등의 시스템)
그 외에는 사리에 밟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선거란 것이 비용 측면보다는 축제요 살풀이로 격상되며
지금처럼 생사를 걸거나 후안무치한 섬멸전이 아니고 민의를 확인하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요식행위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대게 출발은
화려하나 끝은 꼬리를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며 사람의 손이 닿으면 대체로
더러워진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생각(인간불신)이 옳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절대적인 인간은 절대적으로 위험하다는
것과 같다. 페리클레스가 죽자 아테네가 망하고 시저가 죽자 로마의 공화정이
끝난 것은 제도에 의하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의 즉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사는 선의가 배반당하기도 하고 인간의 마음은 럭비 콩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측간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며, 득롱망촉(得隴望蜀)이
있어 후대인의 경계가 되고 있다.
예측가능의 정치를 위해서도 시스템이 필요하며, 인의 장막에 싸인 지도자의 불민과 지도자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도 시스템에 의한 정치가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중층적으로 보호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폭정 타도를 외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나 단지 지배세력의 교체에 불과할 뿐이고 승냥이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사례는 역사에는 허다하다. 지도자는 국민의 합을 넘지 못한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며 선한 목자들 기대하나 이는 사마리아에서
선한 것을 찾는 것과 같고 지도자의 개성이 강할수록 갈등은 증폭되며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옛날의 악정이나 폭정이 되풀이 될 수 있고
옛날의 암군(暗君)이나 혼군(昏君)이 오늘날에도 다시 부활할 수가 있다.
옛말에 "천시(天時)는 지리(地理)보다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인화가 오늘날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는 시스템들이 상호 합력(合力)하고 시스템들이 지지하면
좋은 정치의 50%는 달성한다고 보고 있다.
30%는 사람이고 나머지 20%는 우호적인 국내외 정세라고 보는 것이다.
시스템은 물과 같아 크고 작은 배를 띄우는 것이며 시스템은 도로와 같아
차종이나 연식이나 운전기술을 따지지 않고 운반해 준다.
이제는 국가 민족 안보 경제 민주주의 등 민주적 가치와 생존권을 가지고
곡예의 정치를 하며 이를 볼모로 하는 충동구매의 정치는 막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 사람이 주가 되는 정치가 아니라 시스템이 주가 되는 정치에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은 지도자가 능력을 발휘하게 하지만
또 자의나 일탈을 제어하기도 한다. 이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위험회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정치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국사는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게끔 간단하지 않다.
이것이 제갈공명의 "안을 굳히고 외연을 확장하는" 천하삼분계(天下三分界)의
중심과 궤를 같이하며 근본을 세운 다음에 이를 활용하는 실학사상이고 공체인용
(工體人用)의 현대적 의미의 변법(變法)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스템 우선의 정치를 굳이 명명한다면
「선기후인론(先基後人論)」이라 부르고자 한다.
2007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