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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낙, 범부의 낙카테고리 없음 2019. 4. 13. 09:10
1.
사람에게 낙(樂)이 없다면 신파식 표현을 빌린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고, 오아시스 없는 사막일 것이다. 확실히 낙은 「고해(苦海)속의 한 가닥 불빛」이며, 시인 윤곤강(尹崑崗)의 「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난 괴로움!」에서 그 반(半)이고, 사람들 입에 자주 회자(膾炙)되는「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가 그 전부라 할 수 있다.
낙은 그것이 소소한 낙이든 가슴이 벅찬 낙이든 사람을 긴장상태에서 이완시키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른하고 노곤한 쾌감을 우리들에게 준다. 낙이야말로 인생에 만족감을 주고 인생을 만끽(滿喫)하게 하며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구가(謳歌)하게 한다.
그러나 낙(즐거움)은, 하늘이 재주를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재주를 주지 않고, 한 사람에게 복을 몰아주지 않는 것처럼, 한 가지 낙을 얻으면 다른 낙들은 포기하게 하는 성질이 있다. 재물과 권력은 독식하고 독점할 수 있으나 낙은 철저하게 나눠 갖는 것이며 그 나눔도 차별이 있고 구별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도자의 낙 범부(凡夫)의 낙을 운위하는 까닭이다.
2.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안빈낙도 (安貧樂道)」라 하여 비록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편안함을 찾고 정신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았다.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체도 즐거움이고, 산천의 풍광을 쐬는 것도 낙이고 소요하고 산보하는 것도 낙이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자족(自足)하는」 것이 대장부의 낙이었고,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 한가?」의 호학(好學)은 성인의 낙이었으며, 「 부끄러움이 없고, 양친과 형제가 살아 있으며, 준재를 가르치는 것」의 도덕적 기상은 군자의 낙이었다.
옛날사람들은 시문(詩文)으로서 화답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고, 삼국지의 조조(曹操)는 영토를 넓히고 법령을 정비하는 수고로움을 「 아! 한없는 이 즐거움을 시로나마 읊어나 보리!」라 하여 성취감에서 즐거움을 맛보았다.그렇다면 오늘은 어떠한가?
옛사람들의 즐거움이 오늘에 꼭 그대로 답습되어야 하며 지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도자나 상류층, 재벌(이하 지도자) 이나 일반 여항의 범인(凡人)들이나 똑같은 낙을 가지고 진흙탕에서 뒹굴며, 똑같은 낙을 갖고 침 튀기고 삿대질 해 가면서 경쟁하고 있다.
3.
지도자라고 인생을 즐기지 말란 법은 없고, 지도자라고 낙을 구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공인이요 상류계층인 그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모럴(moral)이 있고 그에 부응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이 있고 삼가야 할 것이 있고 피해야 할 것이 있다.
노출이 되기 때문에 유명세를 탈 수가 있으며, 알려졌기 때문에 가십거리가 되기 쉽다. 지도자는 확산효과를 일으키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생활이 범상하지 않아야 하고 범상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주는 권위나 명예가 추락하고 , 영(令)이 서지 않으며 반듯한 사람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범부는 「묻지 마 관광」을 할 수 있고, 고성방가를 하며, 대폿집에서 삼겹살을 안주 삼아 걸쭉한 욕지거리 사설을 늘어놓으며 음담패설을 내뱉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술이 취해 대로를 갈지자(之)로 걷거나, 노상방뇨를 하거나 길 위에서 큰 대자(大)로 누워 자도 그러려니 한다. 기대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또 복녀를 보고 게슴츠레한 눈빛을 띠는 비단장수 왕서방이고,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는 유태인 샤일록인 것이다. 그들 모두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부는 실정법 안에서 도덕을 넘나들며 구체적 금지사항을 빼놓고는 다 할 수 있으나. 지도자는 나열한 것만 빼고는 할 수 없는 포괄적 금지의 적용을
받는 것이다.
4.
오늘날은 눈만 뜨면 날마다 새로운 상품들이 물욕을 자극하고 성(sex)이 육감적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항거불능으로 유혹한다. 어느 국회의원의 성추문이나 여느 국회의원들의 언어적 성폭력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범인은 말초신경을 흥분시키는 것을 쫒으나 지도자는 중추기관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행위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
그 옛날 폭군(暴君)인 걸(桀) (紂)의 주지육림(酒池肉林)과 미녀에 대한 탐애는 범인의 낙이지 지도자의 낙은 아니다. 명품을 구하려 해외로 나가고 싹쓸이 쇼핑을 하며 루이 13세라는 최고급 술에다가 캐비어를 안주 삼아 화려한 연회를 베풀고, 대기업의 자제들이 이름 있고 반반한 양가의 규수들을 독차지하며 흥청망청하는 것은 범부의 낙이다.
무릇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우며 입이 즐거운 것은 시정의 범부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지 지도자가 즐겨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5.
지도자는 다음 3가지 낙에서 의미를 찾고 즐거움을 발견해야 한다.
첫째는 고중지락(苦中之樂)이다.
산모가 산고(産苦) 끝에 아이를 낳는 기쁨처럼 고통 속에서 내면의 낙을 찾는 것이다. 구도자(求道者)의「고난을 넘어 환희에로」라는 말처럼 어렵고 힘들지만 극복하는 과정에서 낙을 구하고, 인내 그 자체도 낙이라는 것이며고행과 수행도 낙이라는 생각이다. 인생의 이력(履歷)이 쌓이며, 우주를 조망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다.
둘째가 가치창출의 락(創出樂)이다.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이다. 자기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며, 자기의 행동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다. 옛날 요(堯)임금은 거리에서 본 함포고복(含哺鼓腹)이나 격양가(擊壤歌)에서 얼마나 흐뭇하고 대견해 했을까.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과 토론하며 경연에 참석한 것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셋째가 절제의 락(節制之樂)이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하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도 거만금의 돈을 가지고도 자제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지도자의 낙이다. 무위(無爲)의 낙은 절대 범부가 흉내 낼 수 있는 낙은 아니다. 이렇게 지도자의 낙은 비록 제한되어 있고 범위는 좁지만 그 지향하는 것은 범부의 낙이 따라올 수가 없다.
지도자는 그들이 말로는 경멸하는 3류 낙, 싸구려 낙, 하류 낙과는 선을 뚜렷이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즐거움을 다 움켜지겠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고 내려와야 한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즐거움은 방일(放逸)함과 표표(飄飄)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