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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자의 도와 그 사회적 전용
    카테고리 없음 2019. 4. 13. 22:21

    옛날부터 老子를 비롯한 많은 현인들이「道」를 가리켜 「하늘의 이치」니 「궁극적인 이상」이니 하며, 하나인 도를 여러 모습으로 그렸었다. 플라톤에게 도는 이데아였지만, 내게 도를 정의하라면 「인간정신의 최고, 또는 가치의 절정」쯤 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루쉰(魯迅)은 「많은 사람이 다니면 곧 그것이 길이고, 없던 길도 생겨난다.」고 했는데, 도가 무엇인가를 넌지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란 산 이편의 진리가 산 저편에서도 도가 되어야 하고, 옛사람이나 오늘날의 사람이나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이면 곧 도일 것이다.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 성씨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허리춤에 찬 배는 떨어져 꼭지만 남았다는 우화에서처럼, 정신도 빈약하고 영혼도 사그라지는 오늘의 사람들이나 장차(將次)가 없고 영원을 모르고 오늘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도란 너무나 막막하고 아득할 수도 있다.

     

    도는 편애하지 않고, 한 쪽 편에 가담하지도 않으며,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이라거나. 여기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의 특징인 경향성과 차별성도 모르는 것 같다.

    가짜 도는, 끊고, 가르며, 나뉘고, 깨트리지만 진짜 도는 이어주고. 합하며, 보태고, 붙인다. 탈무드에 만장일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쁘다」는 말이 있는데, 이의를 달고 이견을 말하며 이론을 다는 것도 도이다. 억강부약(抑强扶弱)은 한국의 도라면 Noblesse Oblige는 서양의 도이다.

     

    도가 경색된다는 것은 생각의 동맥경화나 생각의 협심증과 같아 나라에 대입하면 지도층이 제 역할을 못하고 사회제도가 그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기가 돌고, 사회가 발랄하기 위해서는 계속 펌프운동을 해야 하는데, 도가 그 펌프운동인 것이다.


    도가 어느 한 순간 형상이 되고 형체를 띠면, 그때부터 도는 어느 한쪽의 모습이지 천 가지 모습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도는 그림자까지 두지 않으며, 최고의 선은 물과 같아야 한다던 말에서 도는 그 물인 것이다. 도가 물 같아야 함은 그것이 모양을 이루면 그때부터 침노를 당하고 시비 거리가 되고 고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중용이라 하여 이상으로 여겼는데, 이는 도를 뒤에서 본 것이고, 불교 선종에서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나 가섭존자의 염화미소를 말한 것은 도를 옆에서 본 것이다.

     

    도가 글로서 나타나면, 아주 뛰어난 사람 정도나 행간을 읽기도 하고 뜻을 미루어 알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에 얽매여 본래의 정신이나 본뜻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심지어는 문자까지도 훼손할 수 있다.

    이래서 도는 남여사이의 사랑과 같아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부터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도라고 말을 하는 순간부터 도는 훼절되고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다.

     

    도란 거듭 말하거니와 고정된 것을 싫어하고, 특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하늘은 사사롭지 않다가 곧 도의 마음이다. 도는 구태여 히말라야의 설산이나 갠지스 강으로 또는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는 수고로움을 경멸한다.


    노자에게 있어 도란 부드러운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며, 치우치지 않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고정된 것은 딱딱한 것이고 이것은 나무 등걸과 같아 생명이 다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추구한 것들이 고정되어서 사유의 사통팔달을 방해하고, 움직이지 않아서 시대정신을 못 닮거나 못 쫒아 간다면, 그것은 도가 없다고 말 할 수도 있고, 도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2006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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