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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離騷)로 중국문학의 젖줄이 되었고, 단오의 유래이며, 나 홀로 푸르고 나 홀로 깨었다(我獨靑 我獨醒)로 널리 알려진굴원(屈原)은 자신이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나는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許均)과 「내 마음은 호수요」의 시인인
김동명(金東鳴)과 태어난 곳이 같음을 기뻐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옛날 종군(綜軍)이라는 선비가 입신을 하기 위하여 관문을 지나다가 수비병이 통행의 표시로 천을 잘라 주자 「내가 다시 이 관문을 지나갈 적에는 높은 사람이 되어있을 터이니 이런 헝겊쪼가리는 필요 없다」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당시의 가난한 시골아이들이 그러했듯 무작정 상경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종로5가에서 신문팔이, 구두닦이를, 제기동에서 넝마주이 등을 하면서 향학열을 불태웠습니다.
험난했던 고학(苦學)의 길이였지만 책 읽기는 게을리 하지 않았고, 신문의 사설과 칼럼 등을 정독하였는데 특히 칼럼 읽는 것을 좋아하여 조간신문 2부 석간신문 2부
해서 하루 4부는 신문이 가판대에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조선일보의 「만물상」중앙일보의 「분수대」 경향신문의 「여적」은 한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또박또박 탐독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듯합니다. 재미도 솔솔 할뿐 아니라「주객일체」니 「시대정신」 같은 새로운 단어들은 마치 보석 같아서 신비감과 황홀감을 주었습니다. 그 글들은 나의 주의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심금을 울렸었고 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글쓴이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글 솜씨는 통쾌하였고 고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글을 씀으로써 자신을 불태우며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맘에 들었습니다. 뒤에 알았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우휘 최석채 김성식 같은 분들의 글이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적의 꿈은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시바이쩌 박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자아의 형성기요 주관의 확립기에 접한 신문들의 칼럼은 나로 하여금 칼럼니스트로 꿈을 바꾸게 하였으며,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능력이 되든 말든, 지식이 있든 없든 나는 일급지식인을 지향하였습니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 믿고 사법시험에 뜻을 두어 19살 1972년 16회부터 6년 동안 4 번 보았는데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도서관을 출입하며 시험 준비를 하였으나 법서는 보기만 해도 졸리기만 하였고 대신 문학이나 역사서나 철학책들은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였고, 시선을 사로잡았고, 흥분과 긴장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능력의 모자람과 더불어 내가 법조인이 될 수 없었던 제1 원인이라면 내 팔자에는 관운이 없다는 것이 제 2원인일 것입니다. 18살 때 강원도 거진에서 중학생을 상대로 야학을 하는 당돌함도 보였고 그해 여름에는 동해상의 공해인 대화퇴로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가 3일 동안 폭풍우를 만나 수장(水葬)될 뻔도 하였습니다.
28살에는 열사의 나라로 날아가서 리야드 국제공항신축현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인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5000명이 넘는 한국인 중에서 「NO.1」 소리를 외국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1980년 대 후반 창신동 새벽인력시장에 나가면서 하루살이 인생의 고단함과 비애를 맛보았습니다.
1990년을 전후한 신촌로타리에서의 「ZERO」라는 음악 까페의 운영은 음악에
눈 뜨게 하였고, 외환위기후의 2000년을 지나 삼성동에서의 사모 투자자로서의 부침은 인생에서 브레이크와 태클이 무엇인지 알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인생이 잠깐 왔다 가는 것이라 해도 여정(旅情)은 쉬 버릴 수 없고, 낭인(浪人)의 꿈은 퇴색되었습니다. 시대의 유민(流民)으로 살기는 하지만 독서는 계속하였고 틈틈이 글도 쓰고 하였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글의 힘을 알았고 다른 것에 대한 글의 압도적 우위를 믿었습니다.
암울한 삶속에서 독서는 그야말로 진통제이자 각성제였습니다. 나로 하여금 여태까지 넘어지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적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은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 五車)」이란 말의 실천이었으며, 그것은 나의 장자방아고 순욱이 되어 나를 지지하고 부축해 주었습니다.
아, 고전(古典)은 나의 뼈를 단단하게 해 주었고, 나는 고전이라는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책들은 나의 지적욕망을 충족시켜 주었고 지적 호기심에 부응했습니다.
젊었을 적의 포부도 사라지고 내가 이문열이나 최인호 같이 되지 못할 바에는
아예 글을 쓰지 말자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꽃들이 계절에 따라 피는 것이 다르듯이 비록 크고 작기는 해도 다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대가(大家)라는 사람들의 영향 밖에 서있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회피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그리되는 것이아님은 손오공이 부처님 손안을 못 벗어나고, 성서에서 요나가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듯이하늘의 점지이자 운명인가 봅니다.
어느 지인의 권유로 인터넷 중앙일보 디국에 글을 올리게 되었고 조주희님, 서종필님, 김영환님, 박인성님, 임영택님, 박상경님, 김창국님을 비롯한 여러분을 알게 되었고 공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강기태님의 권유로 (이분이 2년 전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졸문을 폴리젠에 링크를 해 주셔서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CNB뉴스라는 인터네 신문에 객원 칼럼니스트란 이름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허명일 수도 있고, 지금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쟁쟁한 사람들에 비하면 졸렬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거대한 양자강이나 나일강도 그 근원을 올라가 보면 남상(濫觴)이라는 적은 술잔의 물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노력과 하늘의 도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진짜든 가짜든 칼럼니스트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또 글쓰기가 하루로 그치든 한 편의 글로 그치든 꿈은 이루어짐을 마녕 실감합니다. 세상사의 오묘함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하늘의 뜻은 너무나 무궁무진함을
알게 되었으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과 「염력(念力)이 강하면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그냥 전해진 빈말이 아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이 자리가 종착역이 될지 간이역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머무르고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만이라도 내 성품과 내 뜻을 다할 것입니다. 10 몇 년 전 장안에서 제일간다는 분이 내 사주를 봤는데 「글을 쓰면 당대를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 예언의 성취여부도 계속 지켜 볼 것입니다.
이 태백의 「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심은 반드시 귀히 쓰시고자 함이라.」라는
말도 실현될 것인지 주시할 것이며, 과연 고목(枯木)에서도 꽃은 피는지 관찰할 것이고, 「가지는 열배 맺기 위해 수척해 진다.」는 어느 시구도 실증적으로 알아볼 것입니다.
나는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고. 잠을 쪼개면서도 글을 쓸 것입니다. 나는 나의 글들 한 편 한 편이 천금(千金)의 값어치를 지니도록 글을 쓸 것입니다.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미당시인의 「국화 옆에서」처럼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으며 간밤에는 무서리가 저리 내려 잠도 오지 않았으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봉평장을 뒤로 되돌아가는 개울물에서 장돌뱅이 허생원이 아들 동이를 보고
흡족해하는 모습이 달빛속에서 불그스레 상기되어 드러나는 달밤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쓸수록 배운 것이 얕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나타내고자하는 것과는 반대로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글이 아무리 좋아도 발표할 공간이 없다면 그 가치는 반감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리를 허락한 중앙 디국과 CNB뉴스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또 나의 부족한 글들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식구들을 만나는 것은 용이 구름을 타고. 범이 날개를 단 것처럼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글 쓰는 사람은 신명나게 쓸 수 있다는 것이고 이분들로 인해서 나의 글은 생명력을 얻습니다.
-끝으로 백락(伯樂)이 한 번 쳐다봄으로 비루한 말이 명마가 된 것처럼 나를 여기에 설 수 있게 한 강기태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7년 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