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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50 에도 아직 꿈을 꾸는 이유 1
    카테고리 없음 2019. 4. 23. 21:41

    지금 40대 이상인 사람들은 어렸을 적, 학교 국어시간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10대 초반의 소년, 소녀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교육적 목적에서 시도되었고, 아이들은 서투른 글 솜씨로 길게 또는 짧게 미래의 자기 모습을 간절하게 종이 위에 그려 넣었다.


    디지탈적인 지금의 아이들과는 달리 아날 로그적인 그때의 아이들은 과학자, 탐험가, 판사, 의사 등을 꼽으며 꿈을 많이 꿨고 사회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노라고 결심을 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산업이 성숙단계에 접어들지 않았고, 사회도 피로현상을 보이지 않아 모두가 참신함이 넘쳤고, 「하면 된다.」는 열정으로 충만하였다.


    나는 이때 「이 다음에 커서 시바이쩌 박사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고 써서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그때 어렸을 적의 꿈이나 포부를 실현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나부터 초라한 성적표 앞에서 할 말을 잃었고, 「한 장군이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만 명 병사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 피라밋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에서는 뜻을 이룬 사람보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세상이 어차피 적자생존의 무대요. 승자를 위한 제도로 되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엄청난 행운아 일 수도 있고 선택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뜻을 못 이룬 사람들을 종래의 인식대로 인생의 실패자나 패배자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인생이라는 것이 일도양단식으로 「이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도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중하기에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려가는 시소를 탔고, 누군가는 수건돌리기에서 술래였던 것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패자인 내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성공이라는 것에 대해 무덤덤해 졌다는 것이다 마치 소가 닭 보듯 성공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성공이라는 것이 이제는 내게서 멀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들은 한 때의 즐거움이나 한 때의 영광으로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할 대상이 아님을 안 것이다.


    사람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산다면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실패를 몇 번 해도 상관없으나 100세를 잡고 그 100세 동안 밥 먹고 잠자고 뭐하는 등의 생물적인 시간을 뺀다면,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너무나 짧고 부족한 것이다.


    아! 아득하게 생각되던 나이 50,  율곡선생은 49세에 돌아가시고 이순신장군은 52세에 전사한 나이.20대 때에는 내가 어떻게 50세까지 살 수 있을까하고 의심하던 나이이고, 30대 때에는  큰 봉우리로 생각하던 나이 50을 넘고 보니, 나도 내 지나온 자리 뒤돌아보고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쉽게 쓴 시나 글이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말처럼, 쉽게 사는 것을 탐하지 않게 여기고, 세상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일에 뒷짐 지고 방관하는 것도 아니고, 나물먹고 물만 먹고 살겠다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세상과 더불어 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육욕을 탐닉하는 것도 한 때의 이로움이 있고, 금전이 소중한 것도 한때의 쓰임에 따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아름다우면 무엇 하는가? 어느 시인이 말했다는 「절세가인(絶世佳人)도 황토로 돌아가는데, 그 밖에 분으로 단장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가 가장 정확하게 인생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도금한 것을 금으로 알았으며, 반짝인다고 금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금과 금 아닌 것을 분별하는 지혜의 여명을 받아 무명을 탈출하는 인식의 지평이 넓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무엇을 먹으며 내일 무엇을 입을까 등 하루하루의 연명책에서 벗어나 추현의 군자는 못되어도 평생의 일을 위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비록 백락은 아니어도 한 번 돌아봄으로 말 값이 올라간 것처럼 사람들에게 언제나 부드러운 눈빛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 중에 「향 싼 종이에서 향냄새가 나고, 똥 싼 종이에서는 똥냄새 난다.」는 말은 평소 사람이 온후하고 인자하면 인격이 훌륭하고 성품이 좋아지는 반면 악한 생각을 하거나 악업을 행하면 오명이 사방에 퍼지기 때문에 평소 수양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옛날 어느 현인은 「나 홀로 푸르고, 나 홀로 깨었다」고 했지만, 나는 쪼개면 쪼갤수록 자르면 자를수록 향냄새가 진동하는 향나무이고 싶다. 그렇지만 이 소망은 인간으로서는 어림없는 소리일 수 있지만, 금당에 모셔진 -저 모나리자의 미소가 따라올 수 없는 반가사유 미륵보살의 미소를 닮을 수만 있다면-

     


    내가  50에도 아직 꿈을 꾸는 이유 2


    굳이 라이나 마리아 릴케(R M Rilke)가 아니더라도  이 가을에는 시인이 되고, 굳이 보헤미아의 벌판이 아니더라도 나뭇잎은  바람에 뒹굴며, 또 사람들은 거리에서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가을에는 너무나 붉게 물들어 선홍빛조차도 슬픔을 자아내는 단풍들이 온산에 가득할 때면 시리도록 눈이 부신 쪽빛하늘을 보고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이때쯤에 나는 이른 새벽 종현(鐘峴)의 종소리에 잠 못 이루어 이리 저리 뒤척인 청년 김동인(金東仁)이 되고 자기를 알아주던 先王 유비(劉備)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출사표를 쓰던 노신(老臣) 제갈굥명(諸葛孔明)이 되어봅니다.


    내가 매일 아침이면 마주하는 도봉산과 수락산 봉우리의 구름들이 외롭게 보이면,50 하고도 2개를 더 보태야 하는 나이에 그동안 이룬 것은 없고 살만 찌며 세월만 보냈다는 허전함은 시시각각 나를 알 수 없는 우수(憂愁)에 깊게 또 깊게 잠기게 합니다.

     

    더구나 어느 사람은 은퇴를 얘기하고 다른 어느 사람은 노후를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나는 아연(啞然)해하고, 50 을 넘으면 인생을 다 살았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나는 실색(失色)합니다.


    나는 쉘리(P B Shelley)처럼 언제 다시 청춘의 영광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워즈워드(W Wordsworth)처럼 한 때의 빛나는 영광을 반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산다고 불평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죽는다 해서 원망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약속이 아직까지 내 귓전을 울리고, 나의 옷소매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성경이 메시아의 재림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의 이행과정인 것처럼 나도 어렸을 적 나의 하느님에게 내 반드시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앞장서겠다는 약속을 「곤궁의 산을 넘고 눈물의 강」을 건너면서도 철석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휴식할 때 팔소매를 걷어 올려야하고, 다른 사람들이 안식할 때 바지 단을 올려 부쳐야합니다. 나는 꽃도 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등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다르지만 다 저마다 특색이 있어 계절의 정취를 드러내는 것처럼 사람도 다 그 때가 있고 정해진 날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이 재능을 주심은 다 쓰임이 있기 때문이라天生我材 必有用」는 이백(李白)의 말이 수사에 불과한지 아닌지를 주시할 것이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옛말이 단순히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말인지 확인할 것이고,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불우한 사람에 대한 동정인지도 점검할 것입니다.


    나는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말이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니고, 염력(念力)이 강하면 이룬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밀턴(J Milton)이 정치적 방탕 끝에 참회하고 실명 속에서도 감옥에서 딸에게 구술하여 실낙원(失樂園)을 저술한 전례를  아!  내가 답보하고 답습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50 대가 인생의 가장 황금기라고 확신합니다. 그동안의 시행착오와 실패 속에서 그야말로 정련된 순금(純金) 같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관조(觀照)하며 인생을 완미(完美)하고 완락(完樂)할 수 있는 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의 경지는 아니지만 천사의 반열에는 능히 들어설 수 있는 당당한 나이라고 봅니다.

    마침 중국 속담에도 55 세이면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는 나이라 하여 인생에서 가장 숙련되고 원기왕성하고 정력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하였고, 오늘날 몇 십 년 전보다 다들 10 년은 젊게 사는 것이나 완력이 아닌 머리로 사는 사회가 도래하였음도 나이 먹었음이 유효경쟁(有效競爭)함을 돕고 있는 말일 것입니다.

     

    아직 능력이 남아있고 기백이 살아있는데 일률적으로 나이라는 재단(裁斷)으로 경원시하는 것은 너무 이르고 너무나 아깝습니다. 오히려 무르익은 기예와 절정의 기량을 능히 펴 보일 수 있는 때이고. 그동안의 시행착오가 정(正)의 효과를 나나날 때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 살아왔고, 안이하게 살았으며, 정신없이 살아온데 대한 참회이고, 내게 기회를 once again 해 달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나는 넬슨(H Nelson)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한 말「I have done my duty. Thanks God!」와 같이 기쁘게 죽고 싶고, 득의의 미소를 띠며 죽고 싶습니다. 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내가 세상에 죽고 없어도 나의 지향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서 언제나 사람들과 같이 하길 바랍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찾으라, 찾아질 것이다.」라는 어렸을 때의 약속의 말씀이 끝까지 지켜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도 기독교도 아닌 일반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짐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고 끝에 이루어져야 가치가 있고, 강원도 어느 학교 복도에 걸려있는 「Easy comes. Easy goes.」라는 말이 벤허(Benhur)를 살리기 위해서 로마 군대가 해전에서 이긴 것처럼 나를 위해서 그때 그 자리에 존재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유대인의 선민사상 같은 천손사상(天孫思想)을 지녔습니다.  크게는 인류라는 집단이 천손에 해당이 되고 작게는 우리 개개인이 천손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늘의 자손이기 때문에 경거망동해서도 안 되고, 무위도식해서도 아니 되니, 끝내는 본향인 하늘나라로 돌아 가야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나이가 몇 살이든 처지가 어떠하든 사람은 끊임없이 낫고자 하는 향상심(向上心)이 있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저 「「군자(君子)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는 말도 이를 설파한 것이라 봅니다. 이 점이 사람이 짐승을 면한 것이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은 이치일 것입니다.


    사람의 일대기(一代記)는 과거를 후회스러운 것으로만 남기거나 추억으로만 몽롱하게 살기에는 그지없이 짧고 너무나 소중합니다. 만 미터나 마라톤 등의 장거리 달리기에서 마지막 스퍼트(점화)를 누가 하는가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는 것처럼 내 인생의 앞으로 남은 구간 구간에서 나를 연소하는 스퍼트를 하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 했다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사실 산중처사(山中處士)도 못되고, 강촌은사(江村隱士)도 못됩니다. 나도 세상에서 공을 이루고 이름을 얻고 싶습니다. 내가 아직도 꿈을 놓치지 않는 것은 나는 이제 시련 속에서 단련되었음을 알고, 고통 속에서 성숙해 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삼국지의 조조가 피력했듯이 「천리마는 마구간에 있어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고, 열사는 나이 들어도 비장한 웅지 꺾이지 않는다네.」가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격려의 글이라 알고 있고, 이제 더 이상 나이가 지장이 되고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다다익선(多多益善)할 수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사람 나이 오십은 거칠 것 없고 두려울 것 없는 나이이자 망육(望六)의 나이이고, 지난 50년의 과오를 아는 지비(知非)의 나이입니다.


    나는 21 세기에 살고 있지만  개화기 신여성들의 열정에도 못 미치고 조선의 육진을 개척한 호랑이장군이나 서북의 다복동 열혈남아의 호기도 없음을 부끄럽고 또 부끄럽게 여깁니다.


    나는 뜻은 있으나 의욕만 앞설까봐 두렵고,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릴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려있음을 알고, 다만 애쓰고 노력할 뿐입니다. 혹시나 내 하느님이 이 마음을 아시고 권능의 손으로 도와주신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05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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