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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카테고리 없음 2019. 5. 4. 11:22
왜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같은 인간을 죽이며, 네 편, 내편을 가르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되고, 증오심을 불태우는가?
일찍이 중국 명나라 때의 유교의 이단아로 불렸던 이탁오는 그의 동심설(童心說)에서「인간은 태어나서 어릴 때까지는 자유롭고 순수하였는데, 자라면서 세상의 온갖 지식을 받아들임으로써 타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원시적인 원죄론(原罪論)과 업장론(業障論)을 뛰어넘는 놀라운 착안이었다.
확실히 세상은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향하였지만 인간은 더 왜소해지고, 세상은 더 어려워져 있다. 인지(人智)가 발달하면 모든 것은 더 명쾌해 지고. 세상은 더욱 평화스러워야 당연한 것임에 불구하고.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배우고 익히며 아는 것들이 그간 우리가 이해하듯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지평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옭아매고 넘어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살면서 획득하고 습득한 모든 것이 사람을 제한하고, 구속할 뿐만 아니라 알면 알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스스로를 어두컴컴한 동굴에 가두고 그것들을 우상시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믿고 따른 것이 이미 굳어있고 말라버렸으며, 그것들이 모든 분쟁과 분란의 씨앗이고. 갈등과 대립의 생산기지인데도, 그것으로 세상을 규정하거나 단정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며, 선악까지도 판정한다.
이미 선을 그어놓고 색을 칠하였기 때문에 선을 넘거나 다른 색을 좋아하면 이단이고 원수이며 적인 것이다. 이러니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은 더욱 강퍅해 지고. 허물이 쌓이는 줄 모르며, 낯짝은 두꺼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은 끝없이 넓은데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이고 세상 전체라 한다. 어찌 진리가 한 집단, 한 종교, 한 지역, 한 사상에만 있겠는가.
사람이 알고 있는 기준(基準)은 고무줄 기준이고. 사람이 의지하는 준거 (準據)도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준거이다. 그래서 한 분야의 전문가나 최고 권위자일수록 더 완고하고 완강하다. 무오류의 탄생이다. 실은 모든 오류와 모순의 중심인데도 말이다.
대부분의 신념이 세상을 망치고 인간을 불행에 빠뜨린 것처럼 지식도 -그것이 역사든 종교든 철학이든- 대부분 세상을 망치고 인간을 불행에 빠뜨린다. 결국 사람이 지금까지 알고 배운 것들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성찰한다는 것인데, 과연 내가 알고 배우고 믿는 것이 생명에 도움이 되고 삶을 바꿀 수 있느냐 일 것이다. 그래서 생떡지베리는「어린 왕자」라는 소설에서 세상을 순수하게 보는 어린이의 마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고,
운보 김기창화백은「나는 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은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어린이의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이 예술혼이고 경이를 느끼는 어린이의 눈은 영감의 원천이라는 뜻일 게다.
이 마음은 곧 성경 마태복음 18장 3절로 연결되어「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되어 인간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은 어린이의 마음속에 있음도 알게 된다.
프랑스의 화가 마티스는「어린이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춤」은 어른들이 아이처럼 손에 손을 잡고 원무를 추는 것인
데, 어떤 것이 세상의 기쁨이고 행복인지를 잘 보여준다.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악은 사람의「 앎」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진리나 도는 하늘이나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새끼, 우리들의 새끼인 어린이의 마음속에 오늘도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2019.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