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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군주가 대통령보다 낫다.카테고리 없음 2020. 6. 22. 21:24
나라(國家)도 사람과 똑같아 너무 이상적인 것을 쫓다가는 뱁새 황새 쫓아가는 격이 되기 쉬우니 그중의 하나가 국가체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공화정은 철학적으로는 근대 합리주의의 산물이고 역사적으로는 군주정에 대항한 시민세력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도 결함이 많으며. 유일한 제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제도가 박제화 되고. 정부방식인 대통령제나 내각책임제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죄다 아름답지 못한 결과가 있고, 미국 트럼프대통령은 돈키호테적 인물이며, 일본 아베수상은 극우적인 사람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정치제도라는 민주정을, 우리가 그동안 신봉하던 민주주의를 이제는 돌아볼 때이고 비판도 할 때라는 것이다, 20대 국회에서 보여준 궤변들은(그 사람들은 거의 떨어졌지만)아직도 지긋하고 21대 총선거에서도 강남의 계급투표는 변함없으며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현재 진행 중이다.
님비현상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공무원연금 등의 개혁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도대체 왜 이럴까? 나는 그것을 「정치의 도착성(倒錯性)」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예로부터 언제나 개혁의 목적과 대상은 경제이고 정치는 엔진인데 이게 거꾸로 되어 정치가 개혁의 목표이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는 범람하고 경제는 언제나 고달픈 것이다.
또 민주주의는 본원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도구적 가치인데, 이것도 뒤바뀌어 인간의 존엄성은 하인이 되고 민주주의가 상전이 된 것이다. 껍데기 민주주의인 것이다.
대의제도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데 이것이 부정부패의 온상이기도 하다. 논공행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필연적으로 다음 선거를 의식해야하니 인기영합적일 수밖에 없고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중·장기적인 국가발전을 가로막는다고 할 수 있다.
민주공화정은 자칫 정치만을 위한 평등, 정치하는 사람만을 위한 평등이 되기 쉽다. 선전과 선동에 능한 사람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정쟁에 닳고 닳은 사람이나 술수에 능한 사람만이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가?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을 세운 존 로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명한 군주가 계속 나오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세습군주제를 반대하고 의회 제도를 지지한다.」고. 우리는 이 말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현명한 군주라면 오늘날의 민주정보다 더 낫다는 것을.
더하여 볼테르나 플라톤은 수정절대주의(修正絶對主義)를 주장하였다. 수정절대주의란 「왕 또는 여왕이 왕국과 백성의 안위를 최우선시하는 현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이다.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날씨와 같은 여론에 휘둘리지 않으니 원대하게 국가의 로드 맵을 세울 수 있다.
확실히 민주정이 망루에서 세상을 내려 본다면 군주정은(현명한 군주) 솔개 되어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왕이 금 화살을 잃어 상심할 때 한 신하가 그 화살을 주은 사람도 이 왕국의 사람일 것이라고 위로한 것이나 부왕(父王)이 장원(莊園)을 선물하자 장차 이 강토가 태자의 것이 될 것인즉 사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는 어느 신하의 말에서 군주정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군주정이야말로 세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구심력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정쟁으로 날을 새며, 천박하고 비열하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정치가 아니라 사명감 충만하고 책임감 충만한 정치의 출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익집단의 극렬한 요구, 정상배들의 발호, 공동체의 약화를 제어하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는 정치, 대승적·대국적 정치의 전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군주가 될 태자는 최고의 교육, 제왕학(帝王學)을 배웠고, 군주는 고질적인 정정불안이 제거되니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오로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만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명한 군주는 현명한 대통령처럼 언제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나 당태종 이세민이나 조선의 세종 같은 임금은 몇 백 년에 걸쳐 한 번씩 나오기 때문에 그저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2020 0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