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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카테고리 없음 2020. 9. 1. 21:37

    좋은 글이 말은 다해도 여운이 오래가는 것처럼 가슴 뭉클한 사랑도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없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사랑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려면 3가지 조건을 가져야 한다. 첫째가 한눈(첫눈)에 반하고 둘째는 끝이 비극적이어야 하며 셋째가 누군가에 의해 (시인 등) 뜻이 배가 되어야 한다. 역사상의 사랑 이야기 중에서 이 3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랑이 있었으니, 바로 인도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과 왕비 무므 타즈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가리발디와 아내 아니타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이다.

     

    샤 자한과 무므 타즈-

     

    샤 자한이 어느 날 시장을 순회하다가 자질구레한 장신구 등을 파는 허름한 차림의 열아홉 살의 처녀 바누 베감을 보고 첫눈에 반해 왕비로 맞아들이니 1612년이었다. 바누 베감을 죽도록 사랑했던 황제는 그녀에게 무므 타즈라는 이름을 지어주니 「궁전의 꽃」이라는 이름이었다. (일설에는 왕비가 황제의 외삼촌 딸로 샤 자한이 황제가 되는데 도움을 주어 더욱 사랑했다고 한다.)

     

    무므 타즈는 두번째 부인이었고 하렘에는 5000여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황제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녀뿐이었다.. 마치 백낙천이 장한가(長恨歌)에서 양귀비를 칭송하는 말 「육궁의 후궁들은 갑자기 빛을 잃었더라 六宮粉黛無顔色」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즐거움이 극진하면 슬픔이 오는가. 자주 황제를 따라 싸움터에 나갔던 왕비는 이번 데칸고원의 원정에도 임신한 몸으로 따라나섰다가 막사에서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죽으니 1631년 6월 7일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에 황제는 충격에 하루아침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몹시 상심한 황제는 그녀를 너무나도 그리워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를 지어주기로 결심하고 22년에 걸쳐 흰 대리석과 보석으로 장식된 건물을 지으니 바로 독일 휘센의 백조의 성인 노이슈반슈타인성(城), 에스파냐의 알람브라 궁전과 함께 인류가 지은 가장 아름다운 3대 건축물의 하나인 타지 마할이다.

     

    그러나 국고 탕진 등의 이유로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재위를 찬탈당하고 야무나강 너머 타지 마할이 보이는 아그라성에 갇히게 된다. 그는 8년 동안 오직 은빛 강물 너며 하얗게 빛나는 아내 무므 타즈가 묻혀있는 타지 마할을 바라보다가 죽게 되는데 그의 나이 75세였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이때의 샤 자한의 슬픔을 가리켜 「샤 자한이 그녀를 그리워하여 흘린 눈물이 야무나강의 강물만큼이나 된다.」고 하였다.

     

    가리발디와 아니타-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의 주역으로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세계의 약소민족과 약소국가의 희망이었다. 신채호 선생이「이태리 통일 3걸전」을 낼 정도로 가리발디는 우리와도 친숙한 이름인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자니클로 언덕에는 이 나라 독립과 통일의 주역인 가리발디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그런데 말위의 가리발디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때는 1849년 2월 로마공화국을 선포하자 종주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무력진압에 나서고 로마 방어의 책임을 맡은 가리발디는 분전했으나 역부족으로 부상을 입고 퇴각한다.

     

    그때 만삭의 몸이었던 아내 아니타가 말라리아에 걸려 베네치아에 가지 못하고 코마치오라는 작은 마을의 한 농장에서 죽게 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속에서 가리발디는 죽은 아내를 급히 묻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아내 아니타가 누군가? 젊은 시절 가리발디는 이태리 출신 이민자가 많았던 우루과이의 아르헨티나로부터의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때 브라질 출신으로 18세의 아니타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는데(1842), 1821년에 태어난 그녀는 이미 14세에 결혼한 유부녀 신분이었다. 로맨티스트이자 휴머니스트인 가리발디를 따라 나선 아니타는 매우 용기가 있었고 강인하였으며 특히 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고 한다. 가리발디와의 사이에 모두 다섯 자녀를 낳은 아니타는 1842년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조직한 「붉은 셔츠의 의용병」에도 매우 열심이었다.

     

    가리발디는 아니타보다 33년을 더 살았지만 언제나 아니타를 잊지 못했다. 가리발디는 늘 낡은 회색 판초위에 아내의 줄무늬 스카프를 매고 다녔는데 아니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86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 가리발디는 비토리얼 엠마뉴엘 2세를 알현한 자리에서도 그녀의 줄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리발디가 아내 아니타를 못 잊어서 아내가 묻힌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고 있다.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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