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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상」을 안다고 하는가.카테고리 없음 2020. 10. 10. 18:03
국회나 광장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방송에서 또는 지면을 통해서 자기 의견을 개진(開陳)하는 사람들은 과연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설사 알고 있더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그들은 자기의 지식이 우물 안 개구리이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할까?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한 사물을 놓고 다른 측면을 보기 때문이고(인식의 주관성). 지(知)는 그만큼의 무지(無知)를 수반하기 때문이며,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시각을 통해 외부세계를 해석하거니와 그나마도 자기의 용량만큼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의 눈은 얼마나 착시를 일으키고. 또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얼마나 변덕을 부리는가. 하루살이에게 아무리 겨울을 얘기해 봐야 알 수 없듯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또 우리가 내세우는 그 어떤 가설이나 이론도 반증(反證) 앞에서는 과연 빈틈없이 탄탄한 것인가?
논리의 끝은 자기모순이다. 일가견은 고정관념이 주관은 편견이 있다는 것이고, 자유는 방일, 평등은 정형화이며, 정통은 외곬이다.. 획일성은 자의적 판단을 방지하고, 안정성은 도식주의로 흐르며, 간결함은 실상과 가깝기보다는 오히려 추상적이다. 세치가 길고 석자가 짧으며, 판결은 여러 개로 갈리고, 강한 것이 선이고 약한 것이 악이며, 시나 신앙은 증명할수록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진다.
「모나리자를 볼 때 기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보면 웃고 있고.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보면 울고 있다.」는 말은 몇 년 전에 내가 남도를 갔다 오는 중에 김제평야 너며 서해 바다의 낙조를 보고 지금 내가 보는 저 해는 지는 해이고 저녁이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떠오르는 해이고 아침일 것이라는 생각과 같을 것이다.
「난세의 마지막이 치세의 시작이고, 치세의 마지막이 난세의 시작」이며, 「높은 것은 낮은 겻의 누적이고. 큰 것은 작은 것의 극치」임을 안 사람은 현인(賢人)일 것이고, 「추한 것이 극에 달하면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추해진다.」고 말한 예첸위(葉淺予)는 예인(藝人)이며, 「철학은 그 위대한 전통을 거부함으로써 그 전통에 충실해진다.」고 말한 하버머스는 역시나 철학자이다.
연기법(緣起法)은 오늘도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생성한다고 가르치고 있고. 변증법에서는 『모순되고 대립하는 쌍방은 상대가 존재할 때에만 자기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덕경 20장의 「배우기를 그쳐야 걱정이 사라진다.絶學無憂」와 식자우한(識者憂患)은 같은 말인 것이다.
생명을 빼고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종교나 사상까지도 신빙성이 더 있느냐 덜 하냐의 문제이고, 분류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분류의 기준 자체가 흔들리면 세상의 옳고 그름도 뒤바뀔 수 있으며, 무릇 진리에 가까울수록 오래 장수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신념을 말하지만 잘못된 신념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모든 진리는 인정받기 전에는 첫째 조롱을 당하고 둘째 반대에 부딪히고 셋째 자명해 지는데 내가 진리를 핍박한 사람일 수 있고, 기존의 지식계층이 장악한 권력은 그 관성 때문에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럴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림이나 명시나 절경의 감상법이 처음에는 감각상의 놀라움으로 감상하고 두 번째는 이성의 감동으로 감상하는 과정을 밟는다고 하고,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면서 실험한 수법, 대상물을 복수의 시점에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캔버스에 합성하는 큐비즘기법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방도이다.
역사는 우연한 모멘텀과 무의식적 매커니즘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알면, 또 역사는 자주 상처를 받지만 스스로 치유함으로서 발전한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의 기표에 복수의 기의가 존재한다,」는 탈근대 문화론의 원리와 세상은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병존하는 구도임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뛰어난 그 어떤 예술가, 신학자, 철학자. 역사가. 과학자도 세상의 일부만을 보고 죽었다. 그래도 그들은 성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 주역의 마지막 64괘가 미제(未濟)로 완성이 아니고 미완성으로 여지를 남겼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고. 부귀는 교사(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사는 음일(방종과 나태)을 낳고, 음일은 다시 빈천을 낳는다.」는 귀심요람(歸心要覽)의 말은 인생과 역사를 통찰한 말이다.
세상의 모든 논리는 결국 0으로 수렴됨을 아는 내가 내 의견을 앞세우는 것은 섣부를 수가 있다. 내가 세상일에 쉽게 단정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상대방을 거세게 몰지 않는 이유이고, 사물의 일부나 사리의 하나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데 구태여 거기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운명을 걸지 않는 이유이다.
2020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