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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대한민국의 정상(頂上)인가?
    카테고리 없음 2019. 2. 20. 16:10

    「통약 불가능성의 사회!」한 침대를 쓰나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부부처럼 상이한 문화만 있지 접점도 없고 교감도 없는 이 사회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할거만 있지 옛날 진시황을 노리던 자객 형가나 백안(白眼)과 청안(靑眼)의 완적같은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오직 가시적인 것들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뿐인 것이다. 그래서 고문의 부흥자 한유가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실 때 제후가 오랑캐의 예법을 행하면 이를 오랑캐라 기록하시고. 오랑캐라도 중국의 예법을 본받으면 중국과 같은 대우로 기록하였다.」는 말은 나라와 시대를 떠나 우리가 추종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유의 언급을 오늘날의 언어로 재해석해보면. 정신이 죽은 민족은 비록 살았어도 죽은 것과 똑같으며. 돈, 권력. 명예조차도 교양과 지성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집안이 통곡하고 나라가 통곡할 수 있으며, 중심과 주변부의 판단은 정직 성실 고결 등의 개인적 성품과 사회적 덕목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는 위선이 참을 핍박하고. 지엽이 근본을 흔들며.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부조리의 득세였다. 사람 노릇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매천」이 살았던 조선말기만이 아니라 오늘도 그때나 매양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쓰레기 속에서 장미가 피어나듯이」「대교(大巧)는 약졸(若拙)이런가」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오물만 있고 퇴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사성어 「화룡점정(畵龍點睛)」에서 그 용의 눈 같은 사람, 공자가 기린 기린아, 한유의 천리마. 소통파의 황곡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우리나라를 문화의 중심이 되게 할 수 있고. 약하고 볼품없는 것도 아름답고 굳세게 만들 수 있으니 이는 인간결정론과 환경결정론에서 인간결정론의 우위를 나타내면서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멸망을 면할 수 있었던 소돔에서의 그 의인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임군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글은 글이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다.」고 한 다산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어찌 다산을 권세가와 비교할 수 있을까? 옛날 중국에 공의휴(公儀休)라는 사람이 노나라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아주 양심적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자기 집의 텃밭에서 심은 채소를 뽑아 먹고서는 그 맛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서둘러 채소밭을 죄다 갈아 엎었다한다. 또 한 번은 자기 집안에서 짠 베가 아주 훌륭한 것을 보고는 그 즉시 베 짜는 아낙을 내쫒고 베틀을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한다. 어찌 공의휴를 재벌에 비교할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의 특징은 먼저 「내 심장이 찔린 것처럼」고뇌한다는 것이다. 로마시인 트렌투스처럼「인간적인 것은 모두 나와 무관할 수 없다.」거나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르댕같이 중국에 있었지만 고국에서 날아오는 친지의 비보에 자신도 생병을 앓았다는 거나 유마거사가 중생이 병이 들어서 나도 병이 들었다는 것과 같이 공업(公業)에 고뇌하고 공관(空觀)에도 고뇌하는 것이다. 인간고 시대고 진리고 이 3고는 이 사람들을 영영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식자우환 같지만 실은 식자의 의무이자 변통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은 도덕성이 있다. 도덕성이란 선을 좋아하고 거짓을 싫어하는 것이다. 나라나 사회나 도덕성이 있어야 합치가 되고 합력을 하고 수긍을 하는 것이다. 공권력의 집행이나 시위대의 요구 중에서 끝내는 도덕성을 갖춘 쪽이 승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 귀족정신과 상통하니

     

    귀족정신이란 남의 불행을 훔치지 않고. 어려울수록 처음의 뜻을 지키려하며. 화려한 정신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현대의 중화이고 중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력을 경계하고 물리력을 무시하며 공리주의에 혐오를 갖는다. 아브라함처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는 정신도 이것의 표현이다. 셋째 비판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권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것을 권유한다. 이분법적인 생각은 이미 용도 폐기되었고, 지평이 넓어져 주지번을 통해 중국에 먼저 알려진 허난설헌 같이 고균선생을 일본사람들이 더 알아본 것 같은 수모를 또 당하지 않는다. 생각에 성역이나 금기가 없다보니 자연스레 상상력은 그 끝이 없어 독자가 작가가 되기도 하고. 작가란 해산의 고통을 분담할 뿐 아예 부정당하기도 한다.

     

    넷째 서로의 한계를 보지 않고 서로의 한계를 짓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최영의 청빈 포은의 절개 우암의 명분이 뜻을 얻고. 안자와 왕수인의 호학, 증삼과 심청의 효성, 계포와 미생의 신의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동등적 세계관을 견지하니 하루살이와 거북이와 생애가 같고. 만물이 일체이며 생명체간에 연대의식을 느낀다. 또 공자를 죽여야 공자가 보이고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보인다는 말의 함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는 생명을 위한 광합성작용이자 체질개선을 위한 대사작용이라 믿으니 호들갑을 떨지 않으며 시중(時中) 이란 말이 가리키듯 오늘이 내 인생의 최적 최고 최상의 날임을 알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 땅에서 지상천국과 도솔천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선진적인 사람은 그 의식과 정신으로서 「오늘날의 야만과 미개, 현대의 오랑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유력자와 대국(大國)은 지도력이나 땅덩이의 크기 아니라 인권 자율 긍휼 같은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제 가치들을 존중하는 데 있는 것이다. 끝으로 아무리 되뇌어도 기분 좋은 말, 고대의 문명비평가인 유우석의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고 있으며 높은 것이고, 못이 얕아도 용이 살고 있으면 신령스럽다.」는 말은 이 사람들이 없으면 진리가 빛을 잃고 천도가 어둡다는 말의 향기로운 표현인 것이다.

     

     

    2009년 유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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