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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에 비극이 그치지 않는 이유카테고리 없음 2021. 2. 5. 21:10
젊어서부터 인간의 비극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비극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생각한 끝에 나름대로의 「뜻」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진하고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도 많으니 당연히 이 「문제」에도 정통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서 찾아보았다. 물론 책을 통해서였다. 그들의 의견은 부분적이고 어조는 모두 달랐지만 한데 모으니 마치 지천이 큰 강물이 되는 것 같았다.
또 내 의견을 장황히 늘어놓기 보다는 그들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들을 소개하고 인용하는 것이 이 「문제」에 관한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면서 안목을 높이는 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다음의 글들은 내가 오래전에 얼굴도 모르는 저자들의 글을 발췌해서 내 나름대로 다듬은 것이다. 고견을 피력한 분들에게 지면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
몰라야 할 것을 알은 데서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으로써 비극은 인간의 그림자 같은 것이 되었다.
인간은 유독 좋은 일에는 밋밋하지만 나쁜 일이나 슬픈 일에는 민감하고 크게 받아들인다. 비극은 전염되고 부풀러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오고(物極必反), 복을 오래 누리면 오히려 화가 되며,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잔이 차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극번은 서재 이름을 구궐재(求闕齋)라고 하였는데, 이도 가득함을 경계하고 모자람을 구하는 주역의 철학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시 태항로(太行路)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생의 험준함은 험한 물길이나 험한 산길 때문이 아니고 인정의 번복에 있다.」고 했다. 날씨 같이 변덕이 심하고 부박한 사람의 마음으로 비극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성현의 조용(嘲慵)이란 글에 보면,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노라면 다들 재물만 찾는다. 털끝만한 이익으로 다투고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탐욕이 비극의 한 원인임도 자명해 졌다.
김홍도는 단원도(檀園圖)에서 정란(鄭瀾)을 만난 뒤의 소회를 이렇게 말한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였다. 예전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들었다.」고. 필경 단원은 왕희지의 난정집서를 읽었을 것이고, 왕희지의 느낌에 동조한 것일 게다. 낙이 다하면 슬픔이 생기는 것은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樂極生悲
누구는 「도연명이 생활 속의 즐거움으로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느냐로 결정하지 않은 과연 도연명다운 결정」이라고 말한다. 「옛사람들의 안빈낙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족(知足)이랄까 자족(自足)이랄까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비극의 소지가 적다.」는 것이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그가 원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그것을 이미 얻었는데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주 탁견이다.
사람이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만년(萬年)을 살아도 부족할 것이다. 내면이 받쳐주거나 내면이 갖춰지지 않고 외부에서 즐거움이나 만족을 구한다면 아무리 겉은 즐거움이 넘치고 만족스러워도 그 인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 무엇이란 쫓아낼 수도 없거니와 가시지도 않는 근원적 슬픔일 것이다.
조안원(曺顔遠)의 다음 시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부귀할 때는 모르는 사람도 몰려오더니만/ 빈천하니까 친척들도 떠나가는구나.」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성(恒性)이 없다. 항성을 기대하는데서 비극은 싹튼다.
황제의 영화가 일반 백성의 자유로움보다 못하고, 황후의 호사가 대갓집 첩의 구속받지 않는 생활보다 못하다. 화려한 출정이 쓸쓸한 귀향보다 못하고, 부유한 늙은이 가난한 젊은이보다 못하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수한 바람이 불고, 무수한 천둥이 치며, 무수한 서리가 내려야 한다.
석가모니는 세상의 모든 논쟁이 부질없음을 깨우쳐주려고 최후의 말을 남긴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덧없으며 결국은 죽는다.」고. 석가는 유한성(有限性)의 속성을 깡그리 파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한성은 곧 비극의 단초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 비극이 멈추지 않는 것은 어떤 일이고간에 끝장을 보면 임계점에 달해 결국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그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 앞의 物極必反이나 樂極生悲를 현대적으로 풀이한 것.
인간의 비극은 인간의 의지로 자연의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경청할만한 말이다. 자연과 분리됨으로써 세상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이 없으면 유기체는 유지될 수 없다. 욕망은 탐욕인데 이것이 마찰을 일으키고 알력을 빚고 무리수를 낳는다. 당연히 비극이 잦을 수밖에 없다.
이병주는 「지리산이 비극인 것은 사상이 현실에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상은 사상인체로 남겨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때는 이상이 현실보다 훨씬 앞서가고, 어느 때는 이상이 현실 뒤로 숨고, 이 문제는 영원한 아포리아( aporia 難題)이다.
또 이병주는 그의 소설 「알렉산드리아 p20」에서 「운명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태워서가고 자기에게 거역하는 사람은 끌고 간다.」고 했는데, 인간의 비극은 운명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사람들의 몫, 모이라(moira)인 것이다.
백석은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극도 사람을 가려서 앉는 것인가.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진리에 다가가는 길이고 또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선언이면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극은 자유함이 없는 상태라는 것도 되고.
인간 삶의 제고와 향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 갖가지 제도의 취지인데, 거꾸로 제도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 인간의 삶이 희생되고 변질되는 데서 비극이 발생한다.
질서를 다른 면에서 본다면 안정이고 차이인데, 안정을 꾀하려면 부패할 수밖에 없고 차이를 인정하면 차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간극과 격차가 비극의 활동무대라는 것.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삶이 더욱 고통스럽다.」는 말이 있다. 성격상에서 오는 비극도 있을 것이다.
「다모클레스의 검(劍)」이란 말이 있다. B.C4세기경 시리쿠스의 왕 디오니시스 1세가 총신(寵臣) 다모클레스에게 검을 바로 위 천장에 매달고 의자에 앉으라고 한데서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숴지기 쉬운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매우 허약하여 비극이 달려들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부숴지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혁명하는 여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한 전선의 젊은 병사에게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는 「우리는 모두 눈 먼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글귀도 있었다. 이 로자의 편지를 받은 사회주의자였던 병사는 얼마안가 전사하였다. 세상에 비극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운명의 여신의 눈이 멀었기 때문인 것이다.
신의 지배나 신의 통치는 바로 고대 그리스 사회의 공동체에 꼭 필요한 정신적 유대감의 근거였다. 훗날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 할 때부터 비극의 화살은 시위를 떠난 것이다. 신의 존재가 인간의 정신적 안정이나 행복감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맥락이다. 신을 모르는 시대에 비극은 더욱 증폭한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회란 것은 -돈키호테를 예로 들면- 나름대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사람을 문제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문제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사람의 문제적 가치와 문제적 인간으로의 전락(轉落).
쾌락은 긍정되고 좋은 것이지만 일정한 한계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쾌락이 절제 하지 못하고 인생의 중요영역을 침범할 때 비극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참 위대한 관찰력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 정치판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릴케의 표현을 빌면 「나의 것이 아닌 잠, 꿈 없는 잠.」일 뿐이다. 그가 정치에 발을 담금으로서 정치 밖 그의 것은 끝이 난다. 예술(학문)과 정치의 존재조건은 비극적이라 한다.
제우스께서 인간들이 사유의 길로 가게 하셨고/ 고통을 통한 배움은/ 유효한 법칙으로 전하셨다. (아가멤논 176-178) 비극이 약이 된다는 역설을 옛날 사람은 알았던 것이다.
「하늘의 은총은 응분의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댓가는 비극이라는 것이다. 「공짜점심은 없다.」는 말도 똑같다. 저자는 그 실례로 오이디푸스가 왕이 되는 신탁을 받지만 아버지 라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범한 것과 이규보가 태어난 이듬해에 무신의 난이 일어나 많은 문신들이 죽은 것을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불쑥불쑥 선승같이 하는 말들에서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다. 그들은 일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실은 많은 정련의 결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합하면 비극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인류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가 한숨 돌릴 수 있는 것은 인생이 덧없는 것처럼 결국 비극도 덧없다는 것이다.
2021,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