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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의사의 슬픔
    카테고리 없음 2019. 2. 20. 16:13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이라며 안중근의사를 노래한 사람은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本)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맑은 영혼을 가진 시인이었다. 안중근의사(義士)가 그로부터 인간적 이해를 얻었다는 것은 확실히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예로부터 테러리스트의 일생은 슬픈 것이었다. 다행히 사마천이 있어 섭정(攝政)과 형가(荊軻)는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낸다.

     

    섭정은 엄중자(嚴仲子)의 알아줌에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丹)의 알아줌에 목숨을 바친다. 인생감의기(人生感意氣)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의사는 사람을 알아주지 않은 조선을 위해 죽어야 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성(聖)토마스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며, 훗날 자기의 행위가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는 진리인 것이 저쪽에서는 오류이다.」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이다.

     

    안의사라고 간디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간디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생각해보지 않았을리 없을 것이며,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사막의 룰인 등가성의 법칙을 안의사가 모를리 없을 것이다. 안의사도 민족보다는 인류가 상위개념이고. 세계는 나라를 포용함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와 안의사의 시야와 역량과 기백은 결코 합쳐질 수 없었다.

     

    시대의 모순 앞에서 사람은 누구는 도피하고. 누구는 달관하며. 누구는 저항한다. 안의사는 타고난 전사(戰士)였기 때문에 끝까지 항거했다. 그에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조선선비의 피가 흘렀고. 낭만파 시인 바이론도 남의 나라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산화하는데 조선인이 조선을 위해 죽는 것은 기꺼운 것이었다.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영혼이 없었는데 의사만은 영혼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절반의 승리였다. 그것은 조선의 자주국가 회복이라는 명제보다는 조선 사람의 기백을 알리는 포효 소리였다. 강침. 강점. 강탈이라는 부정과 불의에 맞선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의의식(正義意識)이였고 정의감(正義感) 이었다. 그것은 분노이되 거룩한 분노였고, 사랑이되 빙설 같은 사랑이었으며, 괴뇌이되 표표(飄飄)한 고뇌었다.

     

    안의사 그도 역시 불행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괴로웠지만 행복한 사나이」였고 의사는 괴로웠고 또 불행하였다. 로마와 일본의 식민지배아래 살았지만 한 사람은 하늘을 말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안의사라고 저 옛시인 백낙천(白樂天)의 「생각해보니 밤이 늦도록 식구들 모여앉아 응당 먼 길 떠난 내 애기도 하겠지.」와 이상은(李商隱)의 「 언제쯤 서쪽 창가 함께 앉아 촛불 심지 자르며, 파산의 봄비 오는 이 날을 얘기할까?」를 꿈속에서조차 그려보지 않았을리 없다.

     

    2011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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