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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길, 민초의 길카테고리 없음 2022. 12. 18. 21:57
지난 11월 늦가을의 어느 날, 나는 볼일이 있어 성남시에 갔다가 친구 두 사람이랑 가까이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를 찾게 되었다. 포은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충절(忠節)의 인물로 교육 받았고, 아직도 선죽교에는 선생이 흘린 피의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감에 젖게 한다.
같이한 두 친구는 드물게 박식한 사람들이다. 여기를 가자고 한 것도, 원래 선생의 묘소는 개풍군에 있다가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는 도중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명정이 날라 떨어진 곳이 여기였고, 이에 범상치 않은 것이라 생각하여 여기에다 선생의 묘를 쓰게 되었다고 덧붙인 것도 이 친구들이다.
묘소 입구에 들어서니 단정하면서도 학식이 있어 뵈는 60대 초반의 문화재 해설을 하는 한 신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우리는 이분과 포은선생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커다란 입석(立石)에 선생의 상징인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丹心歌)가 굵고도 힘차게 검은 글씨로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나는 순간 해설사 선생의 식견을 살피면서 앞으로 해설을 하는데 스토리를 보태라고 「저 시조가 포은의 창작이 아니고 삼국시대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태자로 백제에 잠입했을 때 한주라는 처녀를 사랑하다 돌아갔는데, 처녀의 미색에 홀린 고을 수령이 변사또가 성춘향한테 한 것처럼 하였고 한주는 결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하니 그것까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거듭 「그렇다면 아직 학계에서 의견이 집약되어 있지도 않는데, 포은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커다랗게 정몽주작이라고 쓴 것은 문학적 도둑질이 아니냐?」는 어폐 있는 나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어제꼈다.
곧 우리는 해설사 선생과 함께 포은선생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선생의 묘소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선생의 정신을 추념하였다. 해설사는 「철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오고. 국가의 귀감, 민족의 사표로 선생을 기린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안색을 부드럽게 하면서 「선생의 충절은 인정하나 그것은 우리 같은 민초들이 본받고 따르는 길은 아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것은 나라의 큰 벼슬을 하거나 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응당 따르는 것이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저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끄덕이며 살아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별로 탐탁하지 않게 보인다. 나는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거나 그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법이다.
나는 선생이 왕조국가에서 왕은 신하에게 벼슬을 내리고 신하는 알아줌에 감복하여 목숨을 바치는 봉건적 의리론자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선생이 로마공화정말기에 도시국가 로마에서 출발하여 지중해를 아우르는 대제국이 되자 새로운 강력한 정치체제를 세우려는 쥬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복고주의자 브루투스 일당 같다고 보지 않는다.
선생이 오늘날 의의가 있다면 누군가는 시류를 거슬려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있어야 역사의 수레바퀴가 바르게 굴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인조 때 이괄이 반란군으로 한양에 들어오자 길을 쓸고 황토를 깔던 한양 무지렁이들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유적(流賊) 이자성이 북경에 입성하자 「대순황제만만세」라며 열광하던 북경의 백성인 것이다.
웃으면서 이야기가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니 사방은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2022,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