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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들 -누룽지 아주머니-카테고리 없음 2023. 7. 2. 13:35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더구나 중늙은이가 되고 보면 어느 날 더욱 그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지금 그 사람은 수십 년 소식을 몰라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쉬이 잊지 못하는 것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1967년 10월 28일, 14살의 나는 공부를 그렇게 하고 싶어서 서울로 도망을 친다. 평소 그림을 잘 그린 나는 극장의 포스타를 그리면서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해 12월부터 나는 붓 대신 구두통을 집어들었고 종로 5가에서 구두닦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는 효제국민학교와 담벼락을 같이 한 여관들에서 구두를 닦았고 낮에는 진선미 다방 등을 들락거리면서 신사 숙녀의 구두를 벗기거나 김약국 앞에 의자를 놓고서 손님을 받기도 하였다. 더러는 충신동·이화동으로 구두통을 메고 ‘구두 닦어∽’를 소리치며 다니기도 했다.
당시 나는 창신동 낙산 꼭대기 판잣집에 살았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는 걸어서 종로 5가 여관 골목으로 가는데, 바로 내 일터의 이름은 ‘부흥여관’이었다. 이 여관의 주인아주머니 고향이 속초였고, 부근에 화물 센터가 있어 속초와 강릉 등지에서 해산물을 운반하는 운전자들이 많이 이용했다.
아직 날이 훤해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15여개나 되는 방 앞의 구두들-많을 때는 40컬레-을 한군데 모아서는 부지런히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하면 구두들은 반짝반짝 광이 나고 손님들은 나가기 시작하는데 컬레 당 20원씩 받는다. 사전 동의는 안 받은 강매(强賣)였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통용되었다.
그 여관은 앞의 이유로 아침식사를 팔았는데 ‘조산댁’이라 부르는 여자 한 분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등의 일을 하였다. 나이는 30세 전후로 들은 말로는 결혼은 했지만 아저씨와 사이가 안 좋아 집을 나왔다는데 확실하지 않다. 처녀란 말도 있었다. 매우 싹싹했는데 눈은 언제나 약간 슬퍼보였다.
새벽이라 내가 부흥여관의 나무로 된 대문을 살짝 두드리면 부엌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얼른 나와서 ‘학생, 왔어.’하면서 문을 열어주곤 하셨다. 보통 오전 10시가 되어야 손님들이 다 나가는데 나는 이때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기 때문에 무척 배가 고팠다.
이런 나를 측은하게 봤던지 아주머니는 무쇠 솥에 밥을 하고 누른 노르스름한 누룽지를 설탕을 약간 뿌려서 ‘배고프지.’하면서 주시곤 했다. 시장해서일까 누룽지 맛은 고소하고 달콤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어언 4-5년 동안 내가 아주머니로부터 받아먹은 누룽지는 상당한 양일 것이다. 내가 아직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도 이 누룽지의 힘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옛날 중국 한(漢)나라 개국공신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을 때 냇가에서 배고팠던 자기에게 주먹 밥 하나 준 표모(漂母)를 기억하여 은혜를 갚았는데-
20여 년 전, 내가 사는 거진에서 양양 조산이 멀지 않아 한 번 아주머니를 찾아보았으나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지금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살아계신다면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고 두 손을 잡고 옛날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삶에 권태를 느낄 때면 이따금씩 이 골목을 찾는다. 비록 〈그집앞〉은 아니고 옛날의 모습을 잃은 골목이지만 내게는 어느새 순례지가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아주머니가 미소를 띠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생하처 불상봉(人生何處 不相逢)이라. ‘인생은 만남의 역사’가 아니던가.
2023,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