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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길
    카테고리 없음 2024. 8. 23. 19:52

                                                                  스물넷, 가난한 젊은이의 술회(述懷) (2)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을 나서니 새벽공기가 무척 맑다. 아직 먼동이 트기 전, 희끄무레 하늘 아래 어스름한 대지를 밟는 나, 걸음걸이가 사뿐하다. 태초의 정적을 옮겨온 듯 사위가 고요한데 내가 내는 발자국소리만 긴 여운을 남기며 가볍게 부서진다.

     

    하늘의 뭇 별들은 그 위광을 마지막 더욱 밝히고, 눈에 들어오는 넓은 들판에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볏단들이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려준다. 개천의 물은 맑디맑아 희고, 뚝 옆에 길게 자란 포풀라 나뭇잎들의 바람에 살랑대는 소리는 풍악(風樂)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문득 어떤 상념이 머리를 스친다. 역사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지고, 그것은 끈질긴 생명의 발현이자 약동하는 인간의지라고. 우리보다 앞서간 선각자들은 모두 새벽 이 시간에 그들의 지성을 가다듬고 기개를 간직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하다고 믿는다. 내가 지금 그 지경을 음미하고 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새벽 산책이 즐거운 줄을 안 것이- 뒤늦게나마 발견한 하루를 여는 즐거움에 좇아 나는 호연지기를 마음껏 누리리라.

     

    다시 발길을 옮긴다. 스스롤 살펴도 내가 그렇게 정성스럽고 경건할 수 없다. 두 눈을 감고 내 일평생이 계관시인처럼 가슴 뿌듯한 충만으로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온갖 풍상을 겪었지만 곱게 늙은 노인네의 얼굴을 앞으로의 내 얼굴에서도 역력하게 보아야 한다.

     

    가슴 활짝 열고 기지개를 힘껏 한다. 온몸의 근육이 뿌드득 다시 활동을 하는 신호인지 왕성하게 힘이 솟는다. 두발로는 육중하게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는 듯하다. 이럴 때마다 뭉클 가슴에 은 닿는 것이 있다. 생명은 고귀하다는 것. 생명은 성스럽다는 것.

     

    이 시간만은 나 혼자만의 내밀함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소박하며 나를 낮추는 사색도 할 수 있고, 제왕 같이 나를 높여 명상에도 잠길 수 있다. 진정으로 이 시간은 복되고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나만의 것을 고이 간직하고 나를 지긋이 연소시킨다.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일체가 정정(靜淨)하니 그럼직도 하다.

     

    자연이 나를 빨아 당기는지 내가 자연을 안은 것인지 모두 하나 되었다. 곧 정신을 차리면 난 지금 이곳에 현존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느끼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은 나, 그래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리라. 다시 숙연해 진다. 지금 이 새벽에 곳을 다르지만 잠을 뒤척이거나 새벽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과 내가 한데 어울러 진다.

     

    - 굽고 곧고 크고 작은 저것들이 문명을 받아들였고 숱한 사람들의 사연을 날라줬을 것이다. 새벽을 간다. 새벽을 만난다. 새벽을 말한다. 새벽바다가 은은한 아름다움이라면 새벽의 묵상은 은은한 되돌아봄일 것이다. 내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드려 참나를 만나야겠다. 나의 심성을 곧게 하고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나는 새벽을 맞는다. 거기에 안식이 있으니까.

     

    1977825

    남도땅 벌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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