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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있어, 따라가네.
    카테고리 없음 2019. 2. 13. 19:33


    역시나「독서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었다. 내가「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처음 생각한 것도 어린 시절「독서의 바다」에 빠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소박하게 사회적 성공을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생각은 점차 변하여 인류의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나 내 정신세계를 넓히는 것이 되었다.

     

    앞으로 나의 생물학적 시간은 비록 짧겠지만 우주와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더욱 절실한 것이 되어 이전처럼 앞으로도 곳곳에서 나를 붙잡아 줄 것이다. 생각하면 누군들 지난날을 돌아보아 어찌 아쉽지 않은 날이 없지 않겠느냐 만은,

     

    나도 옛 사람의「자신을 수양했으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니 운명이요. 도를 지켰으나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니 팔자로다.」를 입으로는 말했지만 실은 게을렀던 것이다. 이제 감히 성인의「군자는 배부르게 먹는 것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를 흉내 내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소찬이나 소반도 진수성찬으로 알 수 있고. 움막집도 안락와(安樂窩)로 알게 되었다.

     

    아! 지금은 나라가 망하고(나라는 망할 수 있다.)권력자가 교체되는 것(권력자는 교체된다.)를 염려하지 않는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나라에 가치와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내게 애오라지 실오라기 같았던 기쁨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의 실오라기 같은 기쁨이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상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을 버렸지만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을 지키고 사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자연스럽게 옛날의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사마천이다. 그는「임안에 있는 벗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어떤 죽음은 깃털 같이 가볍고.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人固然有死 惑重于泰山 惑輕鴻毛)」라는 말을 한다. 또 시경에 나오는「높은 산이 있어 우러러 보네. 큰 길이 있어 따라가네. (高山仰止 景行行止)」를 좌우명으로 삼는다.

     

    나는 최고로 잘 산 사람으로 휴머니즘 humanism이 충만하고 너무나 리얼리티 reality한 사람을 꼽는데, 사마천이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마천이 벗에게 보낸 말이나 좌우명으로 삼은 말은 그 얼마나 호방(豪放)하고. 광활(廣闊)하며. 심원(深遠)하고. 고아(高雅)한가?

     

    이 소리는 처절히 깨져본 사람.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내지 못하는 소리이다. 이 소리는 하늘가를 거닐거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이 아니면 낼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 소리는 고통과 고난을 밥 먹듯 하면서 대단한 마음고생과 비상한 마음고생을 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인 것이다.

     

    사마천의 이 말이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생의 중심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생의 심층에 도달했기 때문이며, 그가 생의 근간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있어 따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전인(前人)이든 고인(古人)이든 다행스러운 것이다.

     

    정직하지 않고. 책임감 없는 시대. 정신이 미약하고 도가 끊어진 시대지만, 나는 사마천이 그랬듯 시경에 나오는 구절「큰 산이 있어 우러러 보네. 큰 길이 있어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 본다.

     

    201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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