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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아폴론적인가, 디오니소스적인가?카테고리 없음 2019. 2. 20. 21:21
요즘같이 정치의 존재근거. 정치인의 존립토대를 생각해 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아마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잠자리를 설치기도 하고 자주 깨기도 하다. 꼭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로 몰려 심양으로 떠나는 김상헌이 본 한양도성이나 삼각산의 모습이 오늘 내 망막에 아른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 」는 말은 시의성(時宜性)이 있고. 우리네 삶의 원형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옛 신화나 전설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문화의 양대 원류(源流)를 이루는 헬레니즘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같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만 아폴론(Apollon)과 디오니소스(Dionysos)은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으로서 세상에서 이성과 조화. 균형과 중용을 관장한다고 한다. 아폴론은 귀족적이고 세련되며 깔끔하고 고상하다. 부권 남성적이며 강함이다. 철두철미 냉정하고. 더할 나위 없이 객관적이며 일정한 틀과 형식을 즐겨한다. 그러나 오래되고 자기정화가 없으면 교조적이고 제도권에 만족하며 나중에는 박제나 화석이 되는 운명이다.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으로서 본능과 감성. 광기 사랑 해체 자유 격정 혼돈 충동 방랑이며 일탈이요 나그네이자 자유인이다. 민중적이고 거칠고 끈끈하고 역동적이다. 폭발적이고 파괴적이며 엑스터시 응분 해원 살풀이 해일 화산 모권 부드러움 따뜻함 여성적인 것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창조를 수반하지 않으면 객기나 치기 또는 방종으로 전락한다. 옛날에는 생활이 단순하고 지식이 얕았기 때문에 아폴론적인 것이 우대를 받고 영향력도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그럭저럭 정치를 하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가 상충되고 이것저것 얽혀있는 시대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을 가지고는 부족하였다.
이것을 뛰어넘고 아우르는 것이 필요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가치이다.
아폴론적 가치는 개인에게는 지금도 아주 훌륭한 덕목이나 국가 사회란 단위에서는 막힘이 많았다. 아폴론적 가치는 봉건국가나 왕국에서의 통치술이고 현대의 관료나 행정에 적합한 시스템이지 정치력을 포함하는 정치에는 작동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치에서 아폴론을 대체하고 보완한 것이 디오니소스였다. 디오니소스가 나타남으로써 정치는 그간 「가려운데 남의 다리를 긁는다거나」「울긴 울었는데 누가 죽었는지 모르는」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정치가 제 궤도에 들어온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 신문기자 등등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하나 자신은 아폴론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상대방은 부정하고 부패한 것이 된다. 당태종이나 조선 세종은 비록 봉건군주이지만 발상은 시대를 앞섰기 때문에 명군(名君)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일사불란 일치단결 독일병정 로마군단」만 가지고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백날 계산기를 두드리고 시뮬레이션을 하며 여론조사를 해도 국민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틀렸으면 모두 헛수고인 것이다. 정치는 광상곡(狂想曲)이고 광상시(狂想詩)이다. 정치는 마천루의 숲을 짓는 것이 아니라-그것들은 기술자들이 한다- 삽살개가 짖어대고 닭이 홰를 치는 것을 그리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제가 임금님 앞으로 나가는 것은 제가 세력을 사모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임금님께서 제 앞으로 오는 것은 임금님께서 현명한 선비를 구하시는 걸로 나타납니다.」라는 옛선비(顔斶)의 말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압권이렸다.
2009년 유월 2일